“제사공장(製絲工場) 다음으로 함양에서는 직원수가 많았던 곳이 우리 양조장이었다. 70~80년대가 전성기였다. 요즘은 5일에 한번정도 술을 빚지만 그땐 매일 고두밥 찌는 냄새가 진동했다.” 함양읍 유일의 양조장으로 2대째 함양막걸리의 명성을 잇고 있는 함양합동양조장 하기식(69) 대표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함양양조장은 함양읍 인당강변길 30(이은리)에 터를 잡은 지도 벌써 30년이 되어간다. 하 대표의 선친은 공직생활을 하다 비교적 이른 나이(46세)에 퇴직하고 막걸리 제조사업에 뛰어들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그가 고3이던 1969년의 일이다. 한들 논 70마지기 값인 440만원을 주고 석복(함양읍 팔령)에 있던 삼산양조장을 인수했다. 하 대표는 “당시 한들 논 한마지기(150평) 가격이 6~7만원이었다”며 “440만원은 엄청난 돈이었다”고 했다. 삼산양조장은 1978년 함양읍내에 있던 다른 3개의 양조장과 합병해 용평리 두루침교 인근 위천변에서 함양합동양조장으로 새출발 했다. 4개의 양조장에서 4분의1씩 지분을 갖고 합동양조장을 운영했다. 장날이면 하루 350~400말(1말당 20리터)이 팔렸고 평일에도 꾸준히 200말을 생산했을 만큼 막걸리 소비가 많았다고 한다. 양조장 직원수도 27명이나 됐다. 경리업무를 봤던 서기만 3명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일명 짐바리 자전거에 20리터짜리 말통을 싣고 배달했던 때다. 자전거를 가장 능숙하게 탔던 배달 직원은 한번에 9말까지 싣고 다녔다고 한다. 비포장이던 곰실(웅곡)까지 배달하고 오면 한나절이 걸렸다고 한다. 하 대표가 양조장 일을 시작한 것은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한 1985년부터다. 도회지 생활을 꿈꾸던 하 대표는 군복무 후 서울에서 6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34살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친이 공동 대표로 합동양조장을 운영하던 때다. 그후 막걸리 소비가 점점 줄어들면서 수익이 예전만 못하자 다른 대표들은 하나 둘 양조장를 떠났다. 결국 하 대표가 지분을 모두 매입해 단독 대표가 됐다. 1990년에는 양조장도 현재 위치로 옮겼다. 양조장을 이전한지도 벌써 29년이 됐다. 어느덧 술과 함께한 세월이 35년이다. 2007년부터 아들 인수(37)씨가 동반자이자 후계자로 하 대표의 옆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인수씨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식품 관련학을 전공하고 일찍이 가업을 이어받을 준비를 했다. 마흔 살쯤 되면 귀향해서 가업을 이어가겠다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갖고 있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빨리 아버지와 함께 일하게 돼 힘든 점도 있지만 보람도 많다”고 했다. 그는 “막걸리는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데 막걸리만큼 만들기 어려운 것도 없다”고 했다. “집에서 만들어 마시는 막걸리는 맛이 조금씩 달라도 상관없지만 시판용 막걸리는 맛을 유지하는 게 생명이다”고 했다. 발효와 숙성과정을 거치는 막걸리는 온도, 기후 등 주위 환경에 따라 맛이 달라져 일정한 맛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상당한 기술과 노하우가 필요한 이유다. 함양양조장은 생막걸리뿐 아니라 지역 특산물인 산삼막걸리도 생산한다. 또 인수씨는 ‘고운’이라는 별도 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해 복분자주와 복분자 원액도 생산하고 있다. 함양양조장의 술맛 감별사이자 홍보대사를 자청한 노용성(69)씨는 함양막걸리에 대해 자랑하는 것을 자부심으로 느끼고 산다. “전국에서 생산되는 막걸리를 안먹어 본 게 없다”는 그는 “제품에 대한 자신이 없으면 홍보할 수 없다”면서 “함양막걸리는 내가 보장한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기식 대표는 “2001년 공급지역 제한제 폐지후 대기업의 물량공세로 한때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우리 지역민들은 70% 이상이 함양막걸리를 애용하고 있다”며 변함없이 찾아 주는 지역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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