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에서 ‘뇌 기억술’의 대가이며 유대인이었던 에란 카츠가 전한 뇌의 기억력을 높이는 방법의 일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오늘은 마지막으로 그 두 번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는 수동적인 사고방식에서 능동적 사고방식으로 바뀌어야 할 필요성과 용서가 가져다주는 놀라운 변화와 효과에 대해서 우리에게 큰 도전과 함께 깨달음을 주고 있다.
먼저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육에 대해 말하기를 “유대인들은 랍비 문화가 있어 교사를 지혜의 롤모델로 삼는다. 교사가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고. 또 이스라엘과 유대 사회는 똑똑한 사람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만약 모델이나 TV스타가 롤모델이라면 그들처럼 되길 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회가 변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유대인들에게 교사는 특별한 존재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바로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인정하고 그 좋은 점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나보다 똑똑한 사람을 만나면 비난하고나 거부하는 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거인을 만난다면 그 거인을 두려워 피하지 말고 그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더 넓은 세상을 보아라 라는 잠언은 새겨보아야 한다. 존중할 사람을 존중하고 칭찬할 일들은 칭찬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사회가 될 때 비로서 발전이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한 좋은 것을 매장시키지 않고 닮아가려는 노력은 우리의 뇌를 건강하게 만드는 최고의 방법이다.
그는 또 이어서 말하기를 “한국인은 유교의 영향 때문인지 교육 환경이 수동적이지만, 이스라엘은 굉장히 능동적이다. 사소한 정의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질문하고 답을 찾는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찬양받는 사회이고.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도 선택권을 갖는다. 사립 학교에 갈 건지, 공립학교에 갈 건지. 수동적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타인과의 경쟁 구도가 잡히지 않으니,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수동적인 삶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나의 생각을 퇴보시키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늘날 심각하게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삶을 파괴시키고 있는 스마트 폰 게임중독이라고 생각한다. 전에는 TV가 ‘바보상자’라고 놀림을 받을 때가 있었다.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 이 말은 생각과 사고를 하지 못하고 짜여져 있는 프로그램으로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단조롭고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에 나온 말인데 TV보다 그 영향력 면에 있어서 감히 상대가 되지 않는 스마트 폰은 그야말로 ‘초고속바보상자’라고 이름 붙여져야 한다. 이제 스마트 폰이 아닌, 바보 폰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는 꼭 자녀들에게 행복을 주고 싶다면, 스마트 폰 사용을 제한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아주 중요한 내용으로 우리에게 권면한다. ‘수업할 때 50분마다 10분씩 쉬는 이유도 뇌에 새로운 정보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핵심은 잘 기억하려면 불필요한 걸 잊어야 한다는 것.’ 에란 카츠는 특별히 트라우마나 좌절에 대한 망각은 인생의 축복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잊고 싶어도 나쁜 기억은 더 자주, 오래 뇌에 머무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잊으려면 나쁜 기억과 관련된 부정적인 감정을 최소화해야 한다. 용서가 최선이다. 의식적이고 반복적으로 나를 용서하고 타인을 용서해야한다. 또 하나의 방법은 나쁜 감정에서도 긍정적인 요소를 찾는다. 레몬은 시지만 레모네이드를 만들면 달다. 누가 돈을 훔쳐 갔다면, 그가 남을 도왔다거나 꼭 필요한 부분에 썼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과 나쁜 감정은 우리의 뇌를 파괴시키는 주범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몸이 그런 생각대로 만들어간다는 것을 지난번에 말했다. 그가 말한 부분에서 ‘용서’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용서는 회복이다. 깨어지고 뒤틀린 관계를 다시 정상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용서를 통해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변화 된다. 용서를 한 사람도 그렇게 용서를 받은 사람도 변화된다. 용서는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주지만 분노는 마음에 질병을 심어놓는다. 분노 때문에 술에 취하고, 미움 때문에 살인까지 일어나고 있는 이 사회를 다시 화목한 공동체로 회복하는 길은 오직 용서와 화해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생겨난 참사랑으로 남을 배려하고 돕는 것이다. 용서는 놀랍게도 나의 마음에 채워진 욕심을 사라지게 하고, 사랑을 만들어 내는 놀라운 축복임을 잊지 말자. 촛불을 킨다고 정의롭고 안전한 사회가 될 수 없다. 나의 생각을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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