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입동이다. 날씨가 곶감 말리기에 더없이 좋아 엿새째 곶감을 깎고 있다. 작업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올해는 곶감 농사에 아들 둘이 힘을 보태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 ‘유진국 무유황곶감’을 가업으로 한 번 키워보자고 아들과 의기투합한 것이다. 생산량이 늘어나다 보니 십 수 년 전에 지은 낡은 덕장에 이런저런 돈이 많이 들어간다. 농사라는 게 그렇다. 한 해 곶감 팔아 돈을 좀 만지면 그 돈의 상당 부분은 다음해 시설로 스며든다. 매년 시설 투자를 해서 이제 더 이상 안 해도 되겠다 싶지만 여태까지 그런 해는 없었다. 매년 이런저런 이유로 돈이 들어갔다. 그러다보면 이거 내가 덕장 시설 늘리려고 힘들게 곶감을 깎나 싶을 정도다. 시설이라는 게 세월이 흐르면 다 똥이 되어버릴 텐데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함양군은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업인 생산시설 지원에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연초에 낙상사고로 크게 다치는 바람에 더 이상 곶감농사를 못하게 될 걸로 생각하고 곶감 시설 지원사업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히 몸이 회복되고 곶감 작업에 아들까지 가세하여 생산량을 오히려 늘리다 보니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게 되었다. 뭐 안 되면 할 수 없고 말이라도 해보자 싶어 농업기술센터로 찾아갔다. 담당을 만나 어려운 점을 얘기하고 도와달라고 요청했더니 뜻밖에도 얼른 신청하라고 한다. 가능하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책 ‘요청의 힘’이 이렇게 힘이 쎄구나 싶어 나는 살짝 놀랐다. 안 되면 말고 하고 간 건데 말이다. 지난달에 책을 내자고 제안 받은 출판사에서 책을 세권 선물 받았다. 수필집 두 권과 자기 계발서 한 권이다. 어떤 내용인가 궁금해서 이 책 저 책 스윽 넘겨보다가 김찬배 저 ‘요청의 힘’ 을 그 자리서 다 읽었다. 이 책은 나같이 소심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다 읽고 나서 감동이 가시기 전에 아내에게 읽어보라고 권하니 “내가 그거 읽고 당신에게 자꾸 요청하게 되면 어떡할 껴?”하고 웃는다. 아내는 지금 나폴리 시리즈라는 네 권짜리 연작소설을 읽고 있다. 자기 계발서로 보이는 ‘요청의 힘’이 뻔한 내용일 거라는 짐작이 드는지 읽어보겠다는 대답은 끝내 없다. 우리는 학교에서 쓸데없는 것을 참 많이도 배웠다. 수학 시간에 미적분, 삼각함수, 기하 등등 그 어려운 걸 참 열심히 공부했는데 사실 이런 것들은 나에겐 아무 소용없는 지식이었다. 나에게는 하나도 필요 없는 내용을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야 했는지 유감스럽다. 차라리 ‘요청의 힘’ 같은 책이 교과서라면 많은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텐데 말이다. 책을 읽어보니 성공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혼자 어려워하지 말고 남에게 요청하라고 한다.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 말고 될 때까지 요청하면 언젠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한 달 전에 우리 집에 온 길고양이 수리 생각이 났다. 어쩌면 이 녀석도 ‘요청의 힘’을 읽은 것이 아닐까 싶다. 수리는 저녁 산책 중이던 생면부지의 나에게 다가와 발목에 목덜미를 비비고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했다. 거절당할 수도 있었겠지만 수리는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다. 배가 고팠고 절실했기에 거절당하고 입을 상처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수리는 그냥 다가와 내 발목에 목덜미를 비볐고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치며 냐옹했다. 나는 도무지 거절할 수 없었고 그 때부터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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