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칠십 년대를 거쳐 오신 분이라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에 김치 한 가닥 찢어 올려 먹던 그 맛을 기억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자식들 학비 대느라 벼는 거둔 대로 다 매상으로 내고, 보리밥과 고구마를 주식으로 먹던 시절에는 하얀 쌀밥 구경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늘 할아버지 진지상에 올리려고 큰솥에 삶은 보리밥을 앉히고, 그 가운데를 파서 쌀 한 주먹을 흩어지지 않게 묻어서 밥을 지으셨다. 밥이 다 되면 쌀밥만 조심히 파내어 할아버지 밥그릇에 담으시고, 주변에 몇 알 남은 쌀알은 고루 섞어서 식구들 밥을 퍼셨다. 간혹 할아버지가 밥을 한 그릇 다 비우지 못하시고 물리시기라도 하면 그제야 쌀밥 몇 숟가락이라도 맛볼 수 있었다. 그 시절엔 쌀밥에 간장만 끼얹어 먹어도 최고의 요리였다. 그래서였을까, 병곡에 귀농해 배농사를 짓는 농민이 작년부터 쌀농사를 지어보고 싶다며 같이 해보자고 했을 때 망설임 없이 그러기로 했다. 다섯 마지기 논을 한 도가리(배미의 사투리) 얻어 못자리를 붓고, 봇도랑을 치고 물을 끌어와 논두렁도 짓고, 중고 보행식 이앙기를 안 쓰는 이웃에게 사서 직접 모도 심었다. 제초제를 안 쓰려고 우렁이를 넣고, 찬물이 나는 뒷둠벙을 파서 미꾸라지도 키웠다. 우렁이가 잡지 못한 피는 손으로 뽑아주고, 예취기로 논두렁도 깎아 주었다. 가을엔 물을 빼고 논바닥이 마르기를 기다려 콤바인을 부르고, 벼를 널어 말리고, 한 가마 2500원 주고 도정을 했다. 다섯 마지기에 들어간 경비가 볍씨, 못자리 재료, 유박퇴비, 트랙터 작업, 우렁이 종패, 콤바인, 도정비까지 모두 합쳐 130만원, 수확한 쌀은 20킬로 포대로 38포대였다. 친환경 쌀이므로 6만원으로 잡아도 경비 제하면 겨우 60만원 남은 셈이다. 하루종일 일한 날은 며칠 안 되지만 잠시 논에 나가 일한 날까지 잡으면 횟수로 두 세 명이 합쳐 60회는 된다. 예전처럼 사람 손으로 다 하는 시절이 아니라 힘은 덜 들었지만, 돈으로 계산해보면 한번 일 나가서 겨우 만원 번쯤 번 셈이다. 나 같은 사람이야 벼농사를 돈 벌자고 시작한 일이 아니니 남는 게 없어도 수확하는 재미도 있었다. 한번에 모두 방아를 찧어 형제들과 나눠 먹으며 이야깃거리를 삼으니 만족하였다. 시골에서 평생 매달려 온 몇 마지기 논을 버리지 못하고 벼를 심으시는 어르신들의 사정도 별 차이 없다. 농사 지어 아들과 딸들에게 보내고 어르신 내외 먹을 양식만 하자는 마음이고, 몇 가마 남는 것 팔아 겨울 보낼 기름도 사 넣고 따신 내복도 한 벌 장만하려 한 해만 더 짓자하며 올해도 쌀농사를 지으셨을 것이다. 쌀값이 최근 5년 넘게 내리막을 달리다가 겨우 작년에 20년 전 쌀값 수준을 회복하였고, 올해 또 조금 올라 20킬로 기준으로 5만원 겨우 넘어섰다. 여전히 농민들의 벼농사 인건비는 최저임금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인데, 요즘 쌀값이 좀 오른 것을 두고 일부 언론과 정부에서 호들갑인 모양이다. 북한에 몰래 지원해서 창고가 비었다느니 쌀값이 폭등할 것이라느니 하는 가짜뉴스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농민회에서 산출한 자료에 의하면 2018년 쌀 생산비는 20킬로그램 기준으로 6만 천 원 선이라고 한다. 지난 20년 동안 소비자물가는 74% 상승했지만 쌀값은 26% 상승에 그쳤다. 그리고 쌀값이 전체 물가지수에서 차지는 비중은 0.6% 정도로 핸드폰 요금 3.85%, 커피 값 2.6%보다 낮다. 그런데도 밥 한 공기 100g의 쌀값 220원이 서민들의 생활을 얼마나 더 어렵게 한다고 쌀값이 폭등했다느니 하며 호들갑을 떨어야 하는가? 우리의 생명줄인 땅을 지켜온 분들의 땀을 밥 한 공기 300원도 못 쳐 드릴 만큼 우리 삶이 그리도 팍팍한가? 온갖 음식이 널려있고 먹방이 유행하는 요즘이지만, 삶에 허기가 질 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이 그래도 우리에겐 최고의 음식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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