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이 갖는 욕망을 애욕, 물욕, 권력욕으로 나누곤 한다. 먼 옛날 동굴 속에서 홀로 생존하던 시기에는 애욕은 지금과는 다른 번식본능 정도였고, 물욕도 배고픔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야생열매나 작은 들짐승과 불씨 외에는 바랄 것이 없고, 동굴 안에 황금덩어리가 뒹굴고 있다 해도 그것을 돌 쳐다보듯 하는 해탈한 스님의 마음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홀로 지내는 처지에 권력은 개념조차도 없던 시절이다.
이런 상태는 수렵사회가 끝날 때까지 큰 변화가 없다가 농경사회가 도래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경작을 위한 토지와 씨앗이 필요하고, 불시에 습격해 오는 야수를 방어하고 효율적으로 경작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하면 더 낫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서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된다. 힘세고 상황 판단이 빠른 자는 흉작에 대비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분을 저장할 수 있게 되면서 농사를 망친 사람에게 고리대금을 하는 방법과 남의 것을 빼앗는 기술도 배우고, 그것들이 힘들여 경작하는 일보다 쉽고 부를 축적하기도 용이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축적된 부(富)는 타인을 통제하는 권력을 낳는다.
권력이 만들어준 시간적, 정신적 여유는 미적 감각을 높이면서 예술도 탄생된다. 이성에 대한 미적 감각도 섬세해지면서 종족보존의 본능을 넘어서는 본격적인 애욕이 등장한다. 전국(戰國)시대의 여러 영웅들은 멸망시킨 이웃나라의 왕비와 후궁들을 차지한 뒤 부하들에게 전리품으로 나눠주기도 하는데 전쟁의 목적이 애욕을 얻고자 함인지 이상을 펼칠 세상인지 혼돈스러울 때가 많다.
재산 증식과 애욕 충족을 위해 권력을 좇고, 권력에는 더 큰 재산과 애욕이 따른다. 다행히도(?) 애욕은 장년에 이르면서 줄어들지만, 물욕과 권력욕은 그렇지 않은 게 총욕망 불변의 법칙이라 할 만하다.
인간의 욕망에 따라다니는 부작용의 방패막이라 할 수 있는 ‘청렴’이란 단어도 오래전부터 생겨났다. 청렴의 사전적 의미는 ‘성품과 행실이 높고 맑으며 탐욕이 없음’을 말하는데 성품이 맑은 사람이 탐욕이 크다고는 할 수 없을 테니 그냥 탐욕이 없는 사람을 청렴하다고 할 수 있겠다. 루소는 인간불평등의 기원을 사유재산의 소유라고 지적하면서 원시 자연상태로 돌아가면 순수한 자연감정 아래 인간은 완전히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했는데, 이러한 강요나 교육에 의한 것이 아닌 원시상태의 감정이 자연스러운 ‘청렴’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원시시대로 돌아갈 수도 없을 뿐더러, 가진 것들을 버린다고 해서 순수한 감정과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는 없을 것이므로, 내 것이 아닌 듯 하면 그것을 욕심내지 않는 것만 해도 청렴의 범주에 넣어도 될 듯 싶다.
역사 속 청렴한 분들을 보면 욕망을 억제하면서 살았다기보다는 성장한 어느 시기부터는 욕망 자체를 갖지 않았던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 빈자리에는 사람들이 경탄해마지 않는 인류애 같은 우아한 욕망으로 채워지곤 하는데, ‘청렴’은 욕망의 억제이든 가치관의 발현이든 마음에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 역사 속의 위인들처럼 될 수는 없는 터라,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면 공직자는 청탁금지법이나 직권남용죄 등 알아두어야 할 것이 여러 가지로 많다. 뭔가 부족함을 느끼는 ‘욕망’을 어찌할 수 없다면, 분에 넘치게 얻으려는 ‘욕심’을 억제하는 방법이라도 터득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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