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통 무더위로 신음하던 여름이 어느 듯 지나고, 천고마비의 계절이 왔나 싶더니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벌써 겨울이 성큼 다가옴을 우리에게 알리는 듯하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어서 계절마다 나름대로의 살아가는 맛이 있다. 봄에는 따스한 봄기운과 함께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겨우내 꽁공 얼었던 우리들 마음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고, 여름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피해 심산계곡이나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해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무더위를 날려버리는 그런 추억들도 만들 수 있다.
가을이 되면 산은 저마다 아름다운 오색단풍으로 물들어 우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겨울에는 솜털 같은 새하얀 눈들이 소복이 내려 우리를 포근히 감싸며 온 천지를 환하게 비추기도 한다. 필자가 어렸을 때에는 하루하루의 많은 시간들을 그런 자연과 어울려 지냈다. 봄에는 동산에 올라가 연분홍 빛 진달래를 따 먹기도 하고 한 아름 가져다 책상에 꽂아두기도 하였다. 여름에는 거의 매일 맑디맑은 냇가에서 물고기도 잡고 수영을 하고 놀았으며, 가을에는 황금빛 들판에서 메뚜기를 잡으러 온 들판을 뛰어 다녔고, 겨울에는 일부러 논에 물을 얼려서 온 동네 아이들이 모여 스케이트를 타느라 해 가는 줄을 몰랐다. 혹 눈이 많이 내린 날에는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나름대로 완전무장을 하고 산에 토끼를 잡으러 줄을 지어 출두하였다. 출발할 때의 기세는 호랑이라도 잡을 듯 했지만 실제로 토끼 한 마리 잡아보지 못하였다. 그래도 신이 나서 하얀 눈 덮인 깊은 산속을 몇 시간씩 뛰어다녔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풍요해졌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 삶의 양식들과 도구들이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까지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물론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유익이 참으로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전에 누리지 못하던 수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먹고 마시며 경험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생활의 편리함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로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더불어 삶의 질이 나아지고 우리의 삶이 행복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연일 매스컴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뉴스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미래를 더 어둡게 한다. 그리고 마치 경쟁이나 하듯이 방송사들은 반복적으로 그런 소식들을 쉴 새 없이 흘려내기 때문에 애써 그런 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우리들 귀에 들려오게 되어 있다.
만일 뉴스와는 달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실은 그렇지 않고 깨끗하고 투명하며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사회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대다수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듯이 방송에 나오는 일들은 어쩌면 우리가 다 알고 있었던 그동안 쉬쉬하며 음지에서 행해진 일들이 드러난 것에 불과한 것일 게다.
답답한 마음으로 차를 타고 가거나 홀로 길을 걸으며 바라보는 가을 산들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런데 실제로 가까이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면 그 중에 정말 곱게 물든 나뭇잎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잎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잎들이 서로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한 그루의 나무가 되고, 숲이 되고 산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모여 사는 사회도 들여다보면 그런 것 같다.
여러 가지 방면에서 특출하게 뛰어난 사람들도 혹 있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름대로 자기만의 장점이 있는 반면에 다 허물이 있고 약점이 있으며 부족한 점이 있다. 비록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지만 전체적으로 비쳐지는 삶의 모습이 어쩌면 별 볼품없는 단풍잎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엮어내는 아름다운 숲처럼 사람 살만한 곳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흔히들 하는 말에 “미워하면서 닮는다”하는 말이 있다.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느냐 하는 것이 우리에게 분명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는 때로 여러 가지 부조리하고 악한 일들도 있지만 반대로 따뜻하고 정겨운 모습들도 분명히 곳곳에 많이 숨어 있을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모습들을 만들어 내며 살아가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인격과 삶 깊숙이 그런 좋은 것들을 쌓아야 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것에서 악한 것을 낸다”는 성경 말씀이 있다. 매일 매일 매스컴에서 쏟아지는 그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그것을 보고 듣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무엇을 쌓고 있는지 한번 쯤 생각해 보아야한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에 무엇을 쌓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았으면 좋겠다. 좋은 계절에 아름다운 단풍도 보고 좋은 책들도 많이 읽어 선한 것들을 많이 쌓는 시간들로 채워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한번 쯤 멀찍이 한발 뒤로 물러서서 우리들 사는 세상을 바라보며 참 사람 살만한 곳이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우리가 단풍으로 물든 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듯이 그렇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