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영’, 그는 이름 석 자만 대면 달리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우리나라 서각계의 거장이다.
삼림 송문영(64) 작가를 함양군 서하면 황산마을 자택에서 만났다.
황산마을은 송 작가가 태어난 곳이다. 자신의 호를 딴 삼림(森林)서각연구소 겸 작업장인 공방도 함께 있다. 그는 군대생활을 전후한 10여년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줄곧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의 곁에는 아들 인찬(34) 씨가 15년째 서각인의 길을 걸으며 묵묵히 동행 하고 있다.
송 작가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부산행을 택했다. 공예사에 견습공으로 취업해 목공예를 시작했다. 서각과 인연을 맺은 지 50년이 눈앞이다. 사자, 호랑이 등 각종 동물상과 인물상을 깎고 글자를 새겨 넣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날밤을 새운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목공예가 적성에 딱 맞아떨어졌다. “평생 나무 향기를 맡고 살았지만 여전히 나무향이 좋다”고 했다. 견습공 때는 변변한 월급도 받지 못했다. 3년쯤 지나 경력과 실력이 쌓인 뒤에야 월급도 제법 두둑하게 받았다고 한다. 그는 “아마 당시 군수 월급 정도는 됐을 것”이라며 “목공예 기능공들의 대우가 상당했다”다고 말했다.
송 작가는 조각과 서각을 같이하다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서각에만 몰두 했다. “부친께서 서예를 하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한문과 서예는 남들보다 익숙했고 마을 주변 화림동 계곡에 즐비한 정자를 놀이터 삼아 자란 탓에 서각도 친숙했다”며 “특별한 계기나 고민 없이 서각을 시작한 게 평생 직업이 됐다”고 했다.
송 작가는 본격적으로 서각을 하다 보니 서예의 필요성을 느꼈다. 추사체의 대가로 알려진 도연 김정 선생의 서예지도를 받기 위해 1984년 경남 사천으로 이사했다. 도연 선생으로부터 3년 동안 서예지도를 받고 황산마을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4년 동안 사천을 오가며 서예공부를 계속 했다. 추사체에 안진경체, 구양순체 등을 응용해 서각에 적합한 독특한 서체를 개발했다. 일명 ‘송문영체’다.
그는 “무슨 일이든 꾸준히 노력하고 공부해야한다”면서 “지금도 서각관련 서적과 옥편을 끼고 산다”고 했다. “자연에 가까운, 자연을 닮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혼을 담는다”는 그의 칼끝에서 수많은 원목이 서각 작품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 송 작가가 지금까지 만든 작품은 수천 점에 이른다고 했다. 작품의 크기나 기법, 나무 재질 등에 따라 작업 시간은 달라지지만 보통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일주일에서 한달 정도 소요된다고 했다. 송 작가는 이들 작품 중에서도 함양읍과 마천면의 경계인 지리산 초입 오도재에 설치된 ‘지리산제일문(智異山第一門)’ 현판을 가장 의미 있는 작품으로 꼽았다. “제일문 앞뒤에 각각 한 개씩 두 개를 제작하는 데 6개월이 걸린 작품이다”며 “지리산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이고 고향의 산이어서 그 어느 작품보다 의미가 남다르다”고 했다. 이 외에도 촉석루 촉석문과 공복문, 단양 구인사 등 전국 유명사찰과 누각의 현판, 주련 등 수많은 작품이 그의 칼끝을 통해 탄생했다.
송 작가는 한국서각협회 고문과 한국미술협회 서각분과 위원장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면서도 지역사회를 위해 함양군종합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서각 중급과정 강사를 맡아 서각 대중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동안 개인‧단체전 등 250여 회에 걸쳐 국내외 전시회를 가졌다. 또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경남‧경북‧대전‧울산미술대전 및 국제각자예술대전 등 각종 서각대전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한다.
아버지의 기능을 이어받은 인찬 씨도 15년 경력의 소유자로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 이미 프로작가로 인정받았다. 인찬 씨도 함양군종합사회복지관 서각 초급반 강사를 맡아 수강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는 서각 대전 출품작품 제작과 함께 오는 12월 예정인 함양지역 젊은 예술인 모임의 작품전 준비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