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수리고 작위는 냥작이다. 사교계에서 나는 수리 경 또는 수리 냥작으로 불리는데 냥작은 갸르릉 테라피를 직업으로 하고 다수의 집사를 거느리는 냥이에게 붙여주는, 백작보다 한 단계 높은 작위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인데 내가 처음부터 냥작은 아니었다. 출생는 오히려 불행해서 어린 시절을 강호에서 원시 수렵채취 생활을 하며 떠돌다가 하루 저녁에 자수성가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지금 농부 유집사가 일종의 영농행위라고 주장하며 컴퓨터를 하는 방에서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 휴지를 한 장 찢어 발겨서 열심히 뛰고 있다. 유능한 하키 선수가 스틱으로 퍽을 다루듯 미끄러운 바닥에서 한껏 재주를 부리며 휴지 쪼가리를 요리조리 터치하고 있다.
이미 말했듯이 나의 어린 시절은 지난했다. 내가 지겨웠던 배고픔을 이겨내고 하루 저녁에 수리냥작으로 자수성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해본다.
귀족의 혈통을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집사를 구하지 못해(심각한 구인난으로) 며칠 째 식사를 거른 채 골짜기에 흐르는 물만 먹어 야옹할 힘조차 없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젖 먹던 힘까지 내어 냐아아옹~했다. 나의 마지막 냐아아옹은 회교 사원 탑루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청아한 소리처럼 골짜기를 울리며 멀리 멀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장엄하고 애달픈 소리를 들은 한 시골 부부가 구시락 재를 넘어 나에게 다가왔다.부부는 몸을 낮추고 말했다. ‘아니 귀하신 고양이님께서 여기서 무얼 하시는지요?’ 하며 경건하게 몸을 낮추고 나의 배를 만져보더니 (줄여서 경배라고 한다) 신앙심이 충만해져 나를 자기들의 집으로 모시고 갔다.
냥이 앞에 고자가 붙는 것은 고결한 고귀한 또는 고고한 냥이라는 의미다. 유럽의 귀족 이름에 가문을 상징하는 폰(카라얀), 반(베토벤)이 붙는 거랑 같다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나를 고양이라고 부르면 내가 고귀한 냥이라는 것이다. 이런 고고한 냥이를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순박한 시골부부는 두유를 한 종바리 내어왔는데, 내가 혀끝만 대고 고개를 젖히자 부부는 우왕좌왕하더니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긴 토론 끝에 의견 조율이 이루어졌는지 서로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개 밥그릇에다 개 사료를 한 접시 담아 왔다. 이것도 사실은 격에 맞지는 않았다. 고양이에게 개 사료라니... 하지만 워낙 배가 고팠던 나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갸르릉 갸르릉 거리며 우적우적 먹어치웠다.
시골부부는 나의 갸르릉에 몹시 감동받은 거 같았다. 나는 이 갸르릉 하나로 냥작 작위를 받았고, 삶에 지친 집사와 가족의 영혼에 갸르릉 테라피로 위안을 주고 있다. 단순하다고 까지 할 수 있는 울림이 반복되는 이 갸르릉은 바하의 무반주 첼로 조곡과 비견되는데, 듣는 이에게 육신의 안식과 마음의 평화를 안겨다 준다. 나의 경지가 있는 갸르릉 테라피는 아침 시간 내 내장이 비어 있을 때엔 프렐류드로 활기가 넘치고. 저녁 휴식시간 소파에 누운 집사의 산(똥배) 위에서는 3박자의 느린 무곡 사라방드로 명상의 시간을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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