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사선을 긋는 이른 아침, 들국화 향기를 맡으며 거울 앞에 섰습니다. 나의 머리엔 서리가 내렸습니다. 어린 딸이 흰머리 날리는 아버지를 보고 “할아버지~!”하고 불렀던 그때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하얀 머릿결이 나의 머릿결이 되었습니다. 나의 머리에도 아내의 머리에도 첫서리가 내리는 가을입니다.
지표에서 엉긴 수증기가 서리가 되어 처음 내리는 상강霜降은 24절기 중에 열여덟째 절기로 한로와 입동 사이에 있으며 올해는 10월 23일입니다. 상강으로부터 입동 사이의 기간을 5일씩 나눈 초후는 승냥이가 산 짐승을 잡고, 중후는 초목이 누렇게 떨어지며, 말후는 추위가 시작되어 겨울잠을 자는 벌레가 모두 땅에 숨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바쁘게 움직이던 대지 위에 서리가 내리자 굳어진 땅이 부풀어 오릅니다. 해가 뜨면 내려놓습니다. 상강이 지나면 가을의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고 밤의 기온이 낮아집니다. 계절을 아는 가을 발아식물은 상강 전에 뿌리를 내리고 월동을 합니다. 봄에 발아하는 식물은 겨울잠을 자야 합니다. 따뜻하여 봄이 온 줄 알고 발아하면 겨울에 얼어 죽습니다. 그래서 이 기간에는 발아 하지 못하게 서리를 내려 표토를 들어 올립니다. 대지는 종자가 움직이면 발아를 멈춘다는 걸 아나봅니다. 이는 어머니 같은 대지의 배려입니다.
지난해 UN에서 전 세계 인류의 평균수명을 측정하여 연령분류의 표준 규정을 발표하였습니다. 사람의 평생연령을 5단계로 나누어 17세 까지는 미성년자이고 18세에서 65세 까지는 청년, 66세에서 79세 까지는 중년, 80세에서 99세 까지는 노년, 그리고 100세 이후는 장수 노인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인구가 14% 넘어섰습니다. 국민 GDP 3%가 떨어지는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65세는 청년이고, 그 이후 79세까지는 중년으로 멋과 품위로 일을 기대하는 시대입니다. 머리에 내린 서리는 해가 뜨면 녹아버린 다는 생각으로 할일을 하는 고령사회 일원입니다.
우리 속담에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 가을 들판에는 대부인大夫人 마님이 나막신짝 들고 나선다.’라는 말이 쓸모없는 부지깽이도 필요할 만큼 바쁘고 귀하신 대부인까지 나서야 할 만큼 곡식 갈무리로 바쁜 절기를 뜻합니다.
100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 듭니다. 딸기하우스에도 사과농장에도 가을걷이 들판에도 하얀 머리카락이 날립니다. 일터에도 쉼터에도 서리가 내립니다. 가을은 그동안 정신없이 달려온 삶을 진정시킵니다. 나의 집은 소나무 숲의 가장자리에 지었습니다. 문패에 ‘솔숲에 시간은 머물고~’라고 썼습니다. 소나무에 서리가 내리니 사랑과 평안이 머무는 복된 보금자리가 됩니다.
이제 추수는 마무리 짓고 절정에 이른 단풍구경하며 들국화차를 마셔야겠습니다. 들국화는 서리를 이겨내고 꿋꿋하게 피어난 것이 좋습니다. 서리가 내리는 우리 동네에 햇살이 내립니다. 국화차 한잔 마시며 정비석 시인의 ‘들국화’를 읊조려 봅니다.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다. 시들어 가는 풀밭에 팔베개를 베고 누워서, 유리알처럼 파랗게 게인 하늘을 고요히 우러러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까닭 없이 서글퍼지면서 눈시울에 눈물이 어리어지는 것은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순순한 감정이다. -중략- 찬란한 빛깔로 유혹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 없는 가운데 자신의 순결성을 솔직히 보여 주는 그 겸손이 더 한층 고결하다는 말이다. 나는 가을을 사랑한다. 그러기에 꽃도 가을꽃을 사랑하고, 가을꽃 중에서도 들국화를 가장 사랑하는 것이다.’ 서리는 흙을 머리에 이고 조용히 반짝 거리며 동감합니다.
가을입니다. 어설프게 펴진 배추 잎에도, 엉클어진 무 잎에도 서리가 내렸습니다. 다른 풀들은 서리 맞으면 시들거리지만 배추와 무는 서리를 맞아야 활기를 얻어 제 맛을 냅니다. 서리는 대지를 들썩이며 새벽마다 일을 합니다. 서리는 대지의 백발입니다. 백발은 고귀한 이름이 빛나는 면류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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