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 혼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회로부터 도태된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이러한 단어는 이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끽하고 즐기며 살아간다는 욜로(YOLO : You Only Live Once)의 트렌드와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로써 인정받고 있다. 이는 과거에 오랫동안 우리나라 사회를 지배해왔던 집단주의와 공동체 지향성을 탈피해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전근대, 근대 사회에서 사회 통합의 근간으로 여겨지던 민족, 민중은 계속 강조되어 왔지만 개인으로써는 존재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욕구가 이제야 보가 터지듯 반영되기 시작된 것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개인주의는 항상 집단주의와 상충해온 동시에 조화를 이루었다. 현대 사회 결성 조건인 ‘사회계약론’의 창시자 ‘홉스(Hobbes)’는 사회의 구성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서 합리적인 개인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해 자연 상태를 극복하고 법과 규범(리바이어던)을 만들도록 하였다. 즉, 집단적 행위와 사회의 구성은 개인적 욕구를 위한 수단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 개인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될 경우, 리바이어던은 개인으로써의 존재를 부정하고 전체주의적 사고를 지향하는 디스토피아적 사상으로 전락해버릴 것이다.
물론 이미 집단 속에서 성장해온 우리들은 ‘집단’에서 받는 이익에 흠뻑 취해 개인주의라는 단어를 마치 이타심이 결여된 사람들만이 가지는 불순한 사고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는 앞서 말한 이기주의나 사회를 부정하는 고립주의와는 절대 다르다. 개인주의는 사회의 합리적인 방향을 개발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가 일부 제약될 수 있음을 납득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과도 이성적으로 이익을 타협할 줄 알며 집단의 힘을 동반해야 할 상황에서 타인과 연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개인주의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불합리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에 한해 앞서 말한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로 전락하게 되어 결국 자신의 인센티브마저 잃게 되겠지만 말이다.
필자는 개인주의에 대한 열혈 지지자도, 구태여 일찍이 사회에 불만을 품은 불량학생도 아니다. 오히려 여러 집단에 속해있으면서 집안에서는 귀여운 아들로, 학교에서는 한 학급의 반장으로서 나름의 역할에 충실히 하고 있고 집단으로부터의 이익 또한 충분히 만끽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라는 다소 민감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겪어온 18년이라는 시간은 아마 이 신문의 나이 지긋하신 다른 독자분들이 보면 그저 웃기겠지만 내 나름대로 이 기간 동안 살면서 체감한 불합리라면, 우리나라에서의 ‘집단’이라 함은 너무나도 서열화되어 있고 획일화된 문화에만 맞추어서 사는 것만이 강조되고 있음을 느낀다. 출생배경, 직업(학교), 외모, 차종, 아파트 평수 등 모든 것이 남들에 의해 평가받고 입신양명을 통해 사회에 높은 지위에 올라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얻는 것이 성공이며, 집단 속에서 튀는 것에 대한 공포로 늘 긴장과 피로에 휩싸여 있는 것이 결코 행복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글을 적다 보니 의도치 않게 주관적인 견해가 너무나도 많이 이입됐고 나 또한 성장하면서 더 많은 세상의 부조리와 비합리를 경험하게 되면 이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해 지금의 나조차 앞서 거창하게 말한 것과는 무색하게 사회에서 튀는 것이 무섭고 불확실한 미래에 눈이 멀어 아등바등 사는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의식적으로는 개인이 존중받고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 함부로 간섭하지 않는 성숙한 사회를 기대한다. 싫은 건 싫다고 말하고 좋은 건 좋다고 말하자. 이렇게 한들 우리가 놓치는 것은 원만한 사람이라는 평가지만 그것을 통해 얻은 것은 우리가 원하는 자유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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