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은 풍수를 참 좋아한다.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풍수를 격렬하게 논박하던 사람도 자신이 상(喪)을 당하면 산소 자리를 부탁하곤 한다. 여기에는 남녀노소, 종교도, 교육 정도도, 사회 계층도 관계가 없다. 북한에서도 풍수에 대하여 교과서의 설명은 ‘봉건도배들의 터 잡기 땅놀음’이라고 가르치면서 할아버지 산소를 어디 모셨느냐고 물으면 “아주 좋은 명당에 잘 모셨다”고 대답한다고 한다. 풍수란 한반도의 풍토에 어울려 살아가면서 쌓아 올린 우리 겨레의 땅에 관한 지혜다. 풍수는 땅의 질서와 인간의 논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점과 갈등 속에서 어떤 합치점을 찾고자 하는 전통적인 지리학이다. 땅에는 땅 대로의 존재 근거와 존재 질서가 있는 것이고, 사람에게는 사람대로의 생존 본능과 윤리와 사고방식이 있다. 풍수에서 ‘거(居)’와 ‘주(住)’는 엄격히 구분해서 사용해야 하는 말이다. ‘거’란 일시 머무는 장소요, ‘주’란 살림을 하며 사는 곳을 일컫는다. 예컨대 폭포 아래라든가 계곡물이 가파른 소리를 내지르며 흐르는 곳은 잠시 머물며 관상하는 것은 괜찮지만 살 곳으로는 금기시해야 한다. 그런 곳은 바람 소리 물소리가 한 맺히게 울부짖는 듯 한 터(風水悲愁之地)이기에 그런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풍수것으로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풍수 이론상 파구(破舊:이미 예전에 썼던 곳)터는 삼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옛 터에 새로이 굉대(宏大)한 집을 새로 세우는 것은 이 원칙을 파기하는 일이 된다. 세력이나 돈을 벌었다고 해서 옛 집을 파헤치고 근사한 새 집을 짓는 것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풍수에서 땅은 사람이다. 이는 마치 어려울 때 함께하던 아내나 친구를 형편이 달라졌다고 해서 갈아치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어찌 배신감이 없으랴. 땅 또한 사람과 같아 파구를 쓰는 법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고 어떤 사람은 산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반면 바닷가에서 쓸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계곡이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자연과 인간의 조화의 관계이며 궁합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아파하는 사람이나 어떤 일에서 쓴잔을 들고 상심하고 있는 사람들은 공동묘지 산책이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어떤 무덤에나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무리 허름하고 세상에 거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의 역사는 있는 법이다. 하물며 역사의 기록에 자취를 뚜렷이 남긴 사람의 무덤에 있어서는 말해 무엇하랴. 묘지에 가면 시인도 있고, 독립투사도 있으며, 정치범으로 사형을 당한 사람의 무덤도 있다. 병사들의 묘역을 보면 육군 이병 000의 묘. 1951년 00월 0일 금화에서 전사. 육군 상병 000의 묘. 1952년 00월 00일 금화에서 전사… 등 아들을 둔 여인은 이곳을 지나면서 새로운 느낌을 말 한다. 「학창 시절에는 여기 와서 봉사활동도 하고 했지만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내 아들을 군대에 보낸 지금은 이곳에 서 있기조차 힘든다.」라고 하기도 한다. 이병·일병·상병·병장 이란 젊은 그들이 정말 애국의 마음을 가지고 목숨을 걸 수 있었을까? 권정생 선생의<애국자가 없는 세상〉이란 시의 몇 구절이 묘한 여운을 시사한다.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중략)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하략). 자그마한 비석으로 뒤덮이다시피 한 병사들의 묘역… 그런데 산 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모두가 절대 평등의 상태에 놓여 있다. 애끓는 묘비명을 남긴 어린이의 무덤도 있고, 죽음조차도 끊어 놓을 수 없었던 사랑하던 사람들의 무덤도 있다. 그 모두가 그만그만한 크기의 땅을 차지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화스럽게 그리고 평등하게 자리를 같이하고 있다.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의 무덤. 그가 세상을 떠나던 1956년 추석. 친구들이 세웠다는 조그만 시비(詩碑)가 덩그렇게 무덤을 지킬 뿐이다. 시 〈세월이 가면〉 중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만 거기에 새겨져 있다. 추석을 앞두고 조상의 산소를 벌초하는 계절이라 한 번 되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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