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던 직장은 만55세가 되면 퇴직을 강제했다. 40대 후반에 지점장이 되는데 그때부터는 지점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 자신도 모르게 어른 노릇에 익숙해지게 된다. 정년이 임박해서 마치 지점장을 고려장 기다리는 노인네 보듯 하는 시선을 느끼게 되면 “내 나이가 벌써” 이런 생각을 하다가 퇴직을 한다. 환경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함양에 와서 필자는 젊은이가 되었다. 워낙 연세가 높으신 분들이 많고 함양의 베이비부머들이 당당하게 노년을 맞이하는 덕분에 나이를 잊고 살았다. 1938년부터 하버드대학에서 무려 80년 동안 700여명의 남성을 추적해 조사한 ‘좋은 관계’에 관한 유명한 연구 결과가 있다. 사회적 연결은 매우 유익하고 고독은 해롭다는 것, 관계의 질이 문제이지 친구의 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 좋은 관계는 우리의 몸 뿐만 아니라 뇌도 보호한다는 것인데, 건강하고 행복한 좋은 삶을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좋은 관계’라는 것이다. 모든 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부와 명예를 추구하지만 부와 명예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좋은 삶을 위하여 얼마나 좋은 관계를 만들어 왔는지,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함양살이의 제일 큰 문제는 바람, 풀, 물이 아니었다. 자연과 어울리는 문제는 원하던 일이고 힘들어도 견딜 수 밖에 없는데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선언하지 않는 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는 피할 방법이 없었다. 친구가 아쉬웠다. 온 동네 사람들이 친구요 형, 동생하는 정서인데도 정작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고, 같은 처지인 귀촌인들과도 무슨 연유인지 멀리 두고 온 30년 지기를 대신해줄 ‘벗’을 만드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행복한 삶을 위해 선택한 귀농귀촌이 역설적으로 ‘행복한 삶’에 위협이 되기도 한다. 로맨틱하고 멋지지만 평생 만들어 온 관계들을 어느 정도 단절해야 하는 독한 결단이고, 많은 이들이 전원생활을 꿈꾸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도 새로운 관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어떤 이들에게는 향토(鄕土)인 새로운 정착지에서의 진입장벽이 만만치가 않고 귀촌하는 이들도 논리가 정연하고 자존심도 강한 분들이 대부분이라 정작 행복한 삶을 위한 필수요소인 ‘좋은 관계’ 만드는 일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세월이 꽤 지났어도 옛 친구들은 만나기만 하면 필자가 얼마나 외롭고 심심한지, 지들이 없어 얼마나 불행한지를 확인하려고 한다. 알량한 자존심이 발동한다. 새로 만들어진, 아직은 더 익어야할 ‘좋은 관계’를 자랑한다. “사실 자네들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네, 정치적 이야기를 화제로 삼지 않고 예의를 지키며 인생을 논하는 친구들, 취미생활을 함께 하는 누이들, 수남이 형도 있고, 이런 저런 동생들 때문에...”내친 걸음에 독한 말도 서슴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나는 우정도 유효기간이 있다고 생각하네. 만나면 고교친구는 오늘 졸업한 거 같고, 군대친구도 어제 제대한 거 같지만 40년을 반복하는 같은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은가? 추억을 공유하는 것 말고 우리가 이 나이에 무었을 함께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나는 앞으로 30년 동안 사귈 벗들과 함께 해야겠네!” 옛 친구들은 이제 경조사 자리에서나 만나게 되었다. 반갑기는 한데 옛 이야기를 하기에는 경황이 없으니 악수하고 데면데면하다가 “건강 조심하게, 연락함세”하고 헤어진다. “조용한 요구에 조용한 응답이 있는 것, 어떤 부름에 낮은 목소리의 대답, 모자라는 것을 가만히 채워 주는 것,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고 헤아리는 것, 거만하지 않고 정중한 것, 들으면서 기다리는 것, 마음이 굳어지지 않게 살피는 것, 살펴주는 것, 이러함이 관계를 담백하게 가꾸지 않을 까 싶다. 물같이 담백한 관계..” 앞으로 30년 지기 고목(古木)의 가르침, 나는 잘 지켜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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