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왜 이렇게 예민하냐?”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해?”
위의 두 문장은 내가 지난 일 년 간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불법촬영 규탄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새벽차를 타고 서울까지 올라가고, 학교에선 동기들의 성차별적인 발언을 일일이 지적해서 불편한 상황을 만들었던 지난 일 년,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서 황당한 말을 들었다. 왜 그런 불편함을 조장해서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냐는 것이었다. 나의 예민함이 두려움을 조장했다고? 오히려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건 범죄자의 존재가 아니라 범죄를 방관하는 사회와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사법기관이다. 내가 만약 피해자라면? 만약 내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도 이처럼 사회적 차별에 무관심한 법을 신뢰할 수 있을까? 올해 5월부터 현재까지도 광화문 앞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는 ‘불법촬영 규탄 시위’도 같은 맥락이다. 셀 수 없이 많은 피해를 받은 여성들은 사법기관을 신뢰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으려 했지만 정작 피해자들에게 돌아 온 것은 무관심과 비난이었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세상의 죄악은 거의 늘 무지의 결과다. 선한 의도라 하더라도 이해력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악의만큼 해롭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마치 우리 사회를 카뮈 자신만의 언어로 번역해놓은 것처럼, 뭔가 핀트가 어긋난 모습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다. 현재 성평등에 대해 공부하고 있고, 앞으로 공부할 의향이 있는 남성들은 간혹 자신의 얕은 지식만으로 성평등에 대해 ‘맨스플레인’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한평생을 온 몸으로 여성혐오를 겪어본 당사자들 앞에서. 모르는 것에 대해 공부하려는 노력은 좋지만 자신들이 이것을 왜 배워야 하는지 그 목적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길 권장한다. 학습의 목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만큼 위험한 공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 교사가 성차별 발언을 무분별하게하고 여성혐오 범죄가 일어나도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방관자들은 오히려 피해자를 ‘사회에 혼란을 야기한 죄’로 원색적인 모욕과 비난을 하며 깎아내리기 바쁘며, 가해자는 그 속에서 여유롭게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재확인한다. 우린 조금 더 예민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민함이 다음 세대가 겪을 차별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 곳곳에서 자신의 예민함을 검열하고 있을 여성들에게, 우린 조금 더 예민해져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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