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書齋)에 책이 하나 둘 쌓이다 보면 공간이 좁아져서 문득 이 서재는 내가 주인이 아니고 책이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분명 주인은 ‘나’이다. 내가 사는 집에 책 너가 들어 왔으니 말이다. 주인을 놔두고 객(客)이 방안 가득 차지하게 놔 둘 수는 없어 몇 해에 한번 씩 책을 정리하게 된다. 보관해야 할 책과 버려야 할 책을 구분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책 정리를 할 때 내가 쓴 책은 버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 또한 나의 주관적인 과욕인가 욕심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것은 나의 생각이고 그 처리 권한은 내 책을 읽어보고 가지고 있는 사람의 몫이다. 괜한 생각을 한 게 아닌가하고 조심스러워 질 때가 있다. 어떤 집을 방문했을 대 그 집에 있는 책을 통하여 집주인의 정신세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최신식 가전제품은 이것저것 빠짐없이 많이 구비해 놓고 있으나 책이 없는 집에 들어가 보면 허전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은근히 그 집주인과 가까운 느낌이 덜 가게 된다.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과는 친밀한 인간관계가 맺어질 것 같은 느낌이 덜 들게 되며, 대화를 해 보면 물질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조선후기의 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은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했으며 소설가 황순원(1915~2000) 선생은 ‘되읽고 싶은 책을 단 한권이라도 챙기고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고 하였다. 또 어느 선각자는 ‘책 속에는 분노를 잠재워주는 신(神)의 손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가 슬픔과 분노를 쓰다듬어 잠재워준다’고 하기도 했다. 책을 읽을 때 청년은 급하게 읽고, 중년은 차근차근 읽고, 노인은 읽고 또 읽는다. 나 또한 노년에 들었으니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인생을 성숙시키며 살고 있다.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는 40대, 50대에 이른 사람들이 아직도 고시에 매달려 씨름하고 있는 인생의 중·장년들이 상당수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곳에서는 가끔씩 낙방고배를 마신 준비생들이 생을 포기하고 막다른 선택을 하여 싸늘한 주검으로 실려 나가는 것을 다른 시험 준비생들이 목도하기도 한다고 한다. 물론 목표를 향해서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노년이 되어 지나온 이모저모를 다시 회상해 보면 한때는 어떤 일에 너무 오래 매달려서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했구나! 하고 지난날을 재발견하기도 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포기한다는 것 또한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되돌아보지 않고 꾸준히 노력만 한다고 해서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삶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하는 일이 잘 안될 때, 더 이상 노력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잠시 손을 놓고 쉬거나 되돌아 볼 줄 알아야 하겠다. 인생은 하나의 길만 있는 게 아니다. 인생의 길은 다양하다. 다양하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생각한 대로 되는 게 인생이지만,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 것도 인생이다. 특히 생각한대로 되지 않을 때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해야 한다. 꿈을 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꿈을 포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꿈의 크기가 삶의 크기 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꿈의 크기를 수정하거나 조정할 필요도 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난 다음에 더 노력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이때의 포기는 일의 패배나 종말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일의 시작이라고 보아야 한다. ‘뒤돌아보지 않으면 등 뒤에 열려 있는 문은 결코 볼 수 없다’는 미국의 맹농아(盲聾啞)이며 저술가이자 사회사업가인 헬렌켈러(1880~1968)의 이 말은 변화를 절실히 필요로 하거나 상황이 너무 암담하면 다른 쪽 문을 보라는 말이다. 우리는 닫힌 문 때문에 비탄에 잠겨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신은 한쪽 문을 열어 놓지 않고는 절대로 다른 쪽 문을 닫지 않는다’고 했다. 국가의 정책 또한 이 이론에서 변화의 길을 찾았으면 한다. 어떤 정책을 시도했다가 그 정책의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으면 서둘러 다른 길을 찾아보아야할 것이다. 즉 유연성이 필요하다. 옛말에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했다. 필자는 20여 년 전부터 1년 독서목표량을 100권으로 정하고 꾸준히 책을 읽으면서 노년을 성숙시켜 나가고 있다. 책 속에는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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