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에 소를 키우는 성태 아제는 새벽 6시만 되면 트랙터에 소똥을 가득 싣고 밭으로 간다. 우리 집 바로 옆을 지나가기 때문에 나는 따로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도 덜덜거리는 트랙터 엔진 소리에 눈이 떠진다. 눈을 뜨면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컴퓨터를 켜는 일이다. 명색이 농부라는 자가 첫 아침에 호미 들고 밭 부터 가지 않고 컴퓨터 켜는 게 먼저라니 당신이 진정 농부가 맞느냐고 물음표를 그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농기구의 의미를 좀 더 넓게 해석해서 농부의 컴퓨터는 농기구로 분류한다. 농부는 트랙터로 밭을 갈고 예초기로 풀을 베고 호미로 잡초도 솎아주어야 하지만, 컴퓨터로 내가 짓는 농사에 대한 세세한 기록을 남기고, 필요한 농사 정보를 수집하고 소비자와의 소통하는 작업까지 해야하는데, 이 모든 일을 넓은 의미의 영농 행위로 보는 것이다. (주장하는 것이다. 우기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주말 아침 눈을 뜨고 습관처럼 컴퓨터 전원을 켰는데 화면이 먹통이다. 농부에게 이것은 트랙터가 시동이 안 걸리는 거랑 같은 치명적인 고장이랄 수 있다. 수리 센터에 전화를 했는데 주말이라 월요일 오후 늦은 시간으로 방문수리 일정이 잡혔다. 다시 말해 사흘간 컴퓨터를(농기구를)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불편을 감수하고 또 다른 농기구인 스맛폰으로 당면한 영농행위를 이어가야만 했다. SNS 계정에 영농일지를 포스팅 하는데 컴퓨터에 비해 스맛폰은 작업환경이 상당히 열악하다. 컴퓨터가 트랙터라면 스맛폰은 관리기다. 작은 스맛폰으로 일을 하자니 시간이 몇 배로 걸리고 눈도 아프다. 연식이 있는 눈에 돋보기 안경을 걸치고 손톱 끝으로 톡톡 찍어가며 글자를 만드니 참말로 답답하고 피곤하다. 사흘을 기다려 온 수리 기사가 먹통을 이래저래 두드려보더니 시스템이 깨져서 새로 깔아야 된다고 한다. 새로 까는 거야 시간이 좀 걸린다는 것 외 문제될 것은 없는데, 그동안 드라이버에 저장된 자료가 몽땅 없어진단다. 최근 6년간 쌓인 1테라 분량의 사진자료와 농산물 거래 정보들은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따로 백업을 해 두었어야 했던 것들이다. 당연히 해 두었어야 할 것들을 설마 했더니 설마가 사람 아니 자료 잡게 생겼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컴퓨터를 들고 읍내 전문 수리점 컴천지로 갔다. 운이 좋으면 자료를 모두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나의 구세주인 수리점 사장은 기술이 좋다. 시스템이 완전 깨졌지만 자료는 모두 살릴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라 아침부터 하루 꼬박 작업했는데 그날 저녁까지 못 다해 다음날에야 컴퓨터를 찾을 수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집에 와서 밀린 영농 작업을 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키보드가 먹통이다. 아내는 수리점에 전화를 해보라고 하는데 나는 키보드 불량이든, 컴퓨터 본체 불량이던 전화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 또 다시 컴퓨터와 키보드를 들고 수리점에 달려갔다. 어른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지만 아내 말을 잘 들으면 인생이 편안해진다. 키보드 고장도 아니고 본체 고장도 아니었다. 키보드를 먼저 연결하고 전원을 켰으면 되는 건데 반대로 하는 바람에 인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키보드가 구형이라 그렇다고 한다. 구형인 것은 키보드 뿐만이 아니다. 아내 말대로 전화 한번 해보면 될 것을 나의 핵심 부품도 구형이라 기름값 버려가며 무거운 거 들고 씰데없이 왔다리 갔다리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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