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5일 루마니아 클루즈 나포카 필하모니 홀·레긴 문화예술회관·슬로바키아 비스트리차 민속예술축제다볕유스는 23일 루마니아 클루즈 나포카 필하모니 홀 공연, 24일 루마니아 레긴 문화예술회관 공연, 25일 슬로바키아 비스트리차 민속예술축제 축하공연 등 3일 연달아서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의 여러 도시에서 공연을 펼치는 고된 일정을 소화하였다. 하지만 매 공연마다 객석을 가득 채워주는 현지인들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 23일, 두 번째 공연이 이루어진 클루지나포카는 클루지 주도로서,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이다. 도시는 나포카지역과 클루지지역으로 나뉘며 나포카는 로마 제국 시절부터 발달한 유서 깊은 지역이며, 클루지는 중세 시대부터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중심지로 발달했다. 인구는 30만명이 약간 넘으며, 문화유적이 많고 예술활동이 활발한 문화도시이다. 공연은 클루지나포카 필하모니 초청으로 이루어졌으며, 클루지나포카 필하모니 콘서트 홀에서 개최되었다. 다볕유스의 3차 유럽순회공연에 함께 하고 있는 학부모 손주연씨가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객석은 만석이 되었으며, 많은 지역 유지들이 자리를 채웠다. 오래된 역사도시답게 무대 정면에는 오래된 벽화가 배치되어 있으며, 객석은 티구르무래슈와 비슷한 규모이다. 공연프로그램은 첫회와 동일하였으며, 현지에서 합류한 가야금연주단들이 홀 밖에서 사전 공연을 펼쳐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관객들의 반응은 티르구무래슈보다 훨씬 더 열정적이었으며, 적극적이었다. 연주를 마치고 나오는 단원들에게 사인공세를 펼쳤으며, 현지 청소년들과 단원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기도 하였으며, 차주철씨의 인터뷰 요청에 많은 분들이 응해주었다. 다볕유스는 24일, 루마니아 티르구무래슈의 인근에 위치한 작은 소도시인 레긴에서 공연을 펼쳤다. 레긴은 문화·공업 중심지이자 주도인 티르구무레슈 인근에 있는 작은 소도시로서 인구는 4만명 정도이다. 강을 끼고 있는 소도시인 관계로 기계류 조립, 목제 악기와 소형 선박 등을 생산하고 있다. 공연은 레긴 시장의 초청으로 이루어졌으며, 레긴문화예술회관에서 진행되었다. 공연장은 클래식홀이 아닌 다용도 공간이어서 연주하기에는 불편하고 다소간 협소하였다. 하지만 약 300석 규모의 1, 2층을 관객들이 모두 채워주었다. 대체적으로 동유럽 공연장은 난방시설은 되어 있으나 냉방시설이 되어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이는 여름철에는 사람들이 모두 야외활동을 즐기며 햇볕을 많이 쬐려고 하기 때문에 공연활동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곳도 마찬가지여서 연주단원들은 2시간 가까운 시간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연주를 마쳤다. 반응은 역시 대단하였다. 이곳에서도 기립박수와 앵콜공연을 두 곡이나 하였다. 대한민국의 민간외교 사절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음에 가슴이 뿌듯하였다. 다볕유스는 25일, 루마니아 북부 비스트리차너서우드 주의 주도인 비스트리차에서 공연을 하였다. 비스트리차 강 상류 지대 있는 도시로서 인구는 8만명 정도이다. 중세 시대 무역의 거점으로 성장했으며 1330년 시로 승격되었다. 1353년 매년 정기적으로 15일 동안 박람회를 개최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로부터 부여받았다. 식료품과 건축자재 제조업이 주요경제활동이며 도시 주변지역에서는 목재와 포도주 생산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북서쪽으로 몇 ㎞ 떨어져 있는 너서우드는 목재와 과일, 그리고 농민들의 전통의상에 새기는 아름다운 자수로 유명하다. 이러한 까닭에 비스트리차에서는 매년 민속축제가 펼쳐진다. 다볕유스는 비스트리차 민속축제 집행위원회 초청으로 축제에 참가하여 축하공연을 야외공연장에서 펼쳤다. 1만 여명이 넘는 축제 참가자들이 다볕유스의 공연을 즐겼으며, 동양에서 온 청소년들의 빼어난 연주에 감탄을 연발하였다. 다볕유스는 공식적으로는 26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 근교의 하이든홀 연주를 남겨두고 있다. 하이든홀은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작곡가 하이든이 평생동안 음악활동을 해 왔던 곳으로 오스트리아의 귀족이자 음악 애호가인 카를 요제프 폰 퓌른베르크의 대저택에 딸려있는 연주홀이었다. 하이든은 이 귀족의 저택에서 악기 연주자로서 주로 실내악을 연주했다. 이곳에서 쓴 초기 현악 4중주들을 시작으로 그는 일생 동안 80여 곡의 현악 4중주를 작곡하면서 이 음악형식을 발전시켰다. 1758년 하이든은 퓌른베르크의 추천을 통해 최초로 정규적인 자리를 얻었는데, 그것은 보헤미아의 백작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폰 모르친의 개인 악단을 위해 곡을 써주는 일과 개인 음악교사로서의 일이었다. 이 악단을 위해 하이든은 첫번째 교향곡을 썼는데, 이 작품은 아직 기존의 음악적 관습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신선하고 충격적인 선율의 면모를 통해 미래의 대가 하이든의 작품들을 예견했다. 이곡을 시작으로 하이든은 유명한 교향곡을 많이 작곡하였다. 이렇게 유서깊은 음악홀에서 다볕유스가 연주를 하게 된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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