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 룻기라는 책이 있다. 불신앙과 혼탁한 삶으로 얼룩졌던 사사 시대(기원전 1380~1050년)를 배경으로 일어난 아름다운 남녀의 희생적인 사랑과 그 결과에 대해 내용으로 수많은 독자들에게 감동과 기쁨과 소망을 준 이야기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흉년으로 모압으로 내려간 엘리멜렉의 가정은 그곳에서 남자들이 다 죽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만 남게 되었고 과부가 된 나오미는 이방 여자인 두 며느리를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지만 작은 며느리 룻은 자신의 사상과 종교, 친척 모두를 버리고 시어머니를 따른다. 마침내 고향 베들레헴에 도착하지만, 가난하고 자신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비참한 모습에서 자신의 이름을 나오미(즐거움)에서 마라(쓴 물)라고 부르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후 밭에서 이삭을 줍던 룻은 우연히 보아스를 만나게 된다. 룻의 이야기를 알고 있던 보아스는 특별히 룻을 환대하고 곡식 베는 자들에게 그를 위해 이삭을 많이 흘리게 하는 친절을 베푼다. 집으로 돌아온 룻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신들의 기업 무를 사람인 것을 알고 룻에게 다른 밭에 가지 말고 그곳에서만 이삭을 줍도록 당부하는데 어느 날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보리를 타작하는 날 보아스에게 찾아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하도록 요청하자 이에 룻은 나오미의 명령을 따라 옷을 단정히 하고 밤에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덮고 곁에 눕고 이에 보아스는 시어머니의 말에 순종하는 룻을 귀하게 여기고 자신보다 가까운 친족 중에 기업 무를 자가 없다면 자신이 기업을 무르겠다고 약속하고 보아스는 아침에 성문에 나가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친족에게 기업 무를 책임을 수행하라고 요구하고 만일 그가 거부하면 자신이 기업을 무를 것이라고 선언하자 다른 친족이 그 책임을 포기하고 신을 벗어 보아스에게 줌으로 보아스가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책임을 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고 오벳을 낳았는데 보아스는 다윗의 증조부가 되고 나오미는 아들을 얻는 축복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기업 무를 자’이다. 기업 무를 자는 가난한 친족이 조상에게로 물려받은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야 할 경우 그 땅을 대신 구입하여 그 친족에게 다시 돌려주는 제도이다. 이 세상 어느 나라에도 없는 진정으로 정의와 공의와 사랑이 넘치는 제도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이 제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렇게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독자들은 알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신의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난한 친족의 땅보다 더 두려운 것은 친족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그 남자의 재산은 아이에게 물려주어야 하며 그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닌 친족의 아이가 되기에, 그 동네에서 가장 큰 재력가였던 보아스는 자산의 손해를 감수하고 룻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 즉, 가난하고 가련한 이 자부들을 위해 그는 희생한 것이다. 이제 그 아이와 자신의 엄청난 재산은 다른 친족에게로 넘어갔지만, 이 두 사람의 희생적 사랑을 통해 나오미가 회복되었다. 사랑의 꽃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사랑의 꽃의 뿌리는 희생이다. 희생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으며, 혹여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품이 아닌 짝퉁인 것이다. 이제 곧 6.25 전쟁 발발 68주년이다. 남북화해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보내게 될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대한민국이 그냥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3년간의 전쟁에서 한국군 13만여 만 명과 유엔군 4만여 만 명이 전사하여 이 땅에 묻혔다. 전 세계와 부모세대들의 희생으로 이제 자유대한민국은 자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과 대등한 나라가 된 것이다.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그래서 필자는 나의 축복된 삶을 위해 수고하고 섬긴 가장 가까운 사람들, 곧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성도님들과 이웃들과 친족들에게 깊은 감사와 고마움을 갖으며 그분들의 희생과 섬김이 헛되지 않도록 빛 진 자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나는 나의 것을 주장하지 않고 내려놓을 수 있는가? 끊임없이 되새기고 질문해야 한다. 바로 그렇게 사셨던 예수님과 십자가 앞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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