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커피 한잔 타서 마당에 나서니 아침 햇살이 프랑스 덩굴장미 테라코타를 막 구워내고 있다. 테라코타는 이름처럼 빨간 벽돌을 구운 것 같은 오묘한 색감에 향기까지 달콤한 장미다. 막 벌어진 꽃을 쳐다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커피 맛이 좋다. 테라코타는 신선한 아침 햇살에 한 번, 해거름녘 서산 넘어가는 불그레한 햇살에 또 한 번, 하루 두 번 벽돌색의 장미를 구워낸다. 덩굴장미는 대부분 꽃을 많이 피우지만 테라코타는 구워내는 방식이라 그런지 꽃이 그리 많이 피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송이 두 송이 끝없이 피고 져서, 마치 같은 주제가 집요하게 반복되는 라벨의 볼레로를 꽃으로 연주하는 듯하다. 끝났나 하면 악기만 바꾸어 다른 음색으로 다시 연주되는 그 무곡 말이다. 처음엔 약한 음향으로 시작하여 반복되면서 악기를 하나씩 더하고 스케일을 점점 키우는 볼레로처럼 테라코타도 송이를 점점 늘리며 절정의 오케스트라로 꽃을 피우는 날이 있는데, 오늘 아침 햇살이 그 첫 번째 장미를 구워낸 것이다.
가물었다. 지리산 엄천 골짝엔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농작물이 몹시 힘들어 한다. 감나무는 올 봄 냉해를 운 좋게 피하고 가지마다 열매를 가득 달았는데 수분 공급이 원활하지 않으니 낙과가 되고 있다. 워낙 많이 달렸기에 어차피 떨어져야 할 것들이 떨어지는 거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물어 떨어지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블루베리도 이제 색깔이 나기 시작해서 수확할 때가 되었는데 비가 오지 않으니 열매가 별로 크지 않다. 지난해에도 이맘 때 가물어 열매가 자잘하고 큰 게 드물었는데 만약 올해도 그리된다면 블루베리 농사는 영 재미가 없다. 구라청 예보대로라면 비가 여러 번 왔어야하는데 여기 지리산 엄천 골짝엔 병아리 눈물만큼 오고 말았다. 선거철이라 그런 건지 온다던 비는 선거공약처럼 허망했다. 하지만 손 놓고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비장의 처방을 내렸다. 잘 쓰지 않는 방법인데 이 비책을 쓰자마자 거짓말같이 어제 밤엔 우르르 쾅쾅 겁나게 쏟아졌다. 어제 밤 아내가 잠들기 전에 말했다. “당신 세차를 괜히 한 거 아냐? 비가 많이 오는데...” 아내는 모를 것이다. 내가 세차를 해서 비가 쏟아지는 것을 말이다.
감나무 과수원에 풀을 베었다. 올해는 풀을 안 베고 한번 해보려고 했는데 고라니랑 멧돼지가 너무 설쳐서 어쩔 수가 없다. 모르고 뱀을 밟을 까봐 겁이 나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 보는 눈도 있고 해서 하던대로 하기로 했다.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올해는 늦가을 시원한 바람 불 때 수확시기에 맞춰 딱 한번만 베려고 했는데 농사가 요령만으로 될 일은 아니다. 감나무 사이 통로는 깔끔하게 베어 내고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덩굴은 모두 뜯어 말렸다. 환삼덩굴이랑 칡덩굴은 정말 지독하다. 내가 뜯어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닌 걸 알지만 다른 대책이 없으니 뒷덜미 잡고 늘어져 보는 것이다.
아내가 하얀 덤불장미와 분홍 들장미를 한 무데기 꺾어 거실에 거꾸로 걸어 두었다. 장미는 마르면서 향기가 짙어진다. 아내는 왜 그러지? 왜 그러지? 하며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듯 좋아한다. 아내도 나이가 들수록 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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