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버스 여행기 `1250원의 행복` - 7 수동면 남계마을(2018년 5월 현재)- 원평리 소재 - 세대 43가구- 인구 87명(남41, 여46)- 농가 31가구- 주요농산물 : 벼, 양파- 이장 : 안동근아련한 옛사랑의 추억, 맞바위 이야기 속으로! 수동면 남계마을 도시에 비해 여전히 공기 좋고 물 맑은 함양이라지만 여기 옛날 명성 그대로 그때 그 시절, 깨끗한 자연이 주는 ‘가치’와 ‘감사함’을 지키며 소박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모내기철이 되면 서로 일손을 돕고 겨울이 지나 화사한 봄햇살이 ‘쨍~’ 하고 비치면 맛있는 먹거리를 챙겨 봄꽃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바쁜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꾸밈없는 모습이 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러 우린 수동면 남계마을로 향했다. 함양지리산고속의 농어촌버스를 타고 남계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수동면 소재지에 있으니 안의행 버스를 타면 된다. 함양에서 출발할 경우 남계서원까지는 25분정도 소요되며 버스 하차시 효리마을 도착 전 남계서원 앞에서 내리면 된다. 남계마을은 예전에 60여 가구가 살았으나 남계서원 복원사업 과정에서 15여 가구가 이사를 가거나 이주하여 현재는 43가구가 거주한다. 남계마을은 옛날부터 인재로 넘쳐났던 성리학의 고장이라 불리며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연구하기 좋은 대표마을이다. 마을 앞으로는 덕유산에서 흘러나오는 남계천이 화림구곡을 형성하고 들판 너머로는 백암산이 마을을 마주보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지금 농번기라서 다들 바쁘지”라며 농가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인터뷰하는 양기열(71) 노인회장. 전직 이장출신인 양 노인회장 또한 농사를 짓고 있다. 인력이 부족하고 고령화되어 대부분 기계로 농사를 짓는다. 그렇다보니 있을만한 농기계는 모두 갖췄다. 마을에서 기계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서로 품앗이를 하며 돕기도 한다. 벼농사는 얼마나 짓냐는 질문에 “소일거리로 조금씩 지어~” 한다. “그 조금이 얼마에요”라고 되묻자 전직 노인회장인 양화용(83) 어르신은 “진짜 조금이야, 3000평”, 이어 양 노인회장도 “얼마 안 돼~ 9000평” 한다. 우리가 보기엔 많은 평수인데 어르신들에겐 ‘소일거리’라니,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진다.양파 짓는 농가가 조금씩 늘고 있어도 남계마을의 주요작물은 여전히 벼농사다. 지금 농사를 지으며 아쉬운 게 있다면 마을에 있던 저수지가 한국화이바가 들어서면서 사라져 물 공급이 어렵다는 것이다. “마을주민들이 마음대로 물 공급을 조절하면 좋을 텐데, 필요할 때 마다 수로를 열어달라고 하는 게 번거롭다. 마을에서 사라진 저수지가 다시 생기면 좋겠다”고 말했다.벼농사를 짓기 전 남계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소를 키웠다. 그 당시엔 소 한 마리 팔면 등록금을 장만했다. 양기열 회장은 “그때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종치면 소 풀 먹이고 꼴 베는 게 일이었어. 옛날엔 ‘오염’이란 단어도 없었지~ 미나리도 뜯어먹고 길가에 핀 건 다 먹을 수 있었으니까”라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어느새 70·80대가 된 어르신들은 여전히 새벽 5시에 집을 나가 논에 로터리를 치고 일을 한다. 그때 그 시절 어린 초등학생들이 ‘소’에서 ‘벼’로 작물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이른 아침을 맞이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며 작은 행복을 실천하고 있는 남계마을 어르신들! 요즘 떠오르는 단어,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우린 이곳에서 배웠다.선배님이자 형수님! 정춘상(68)·김종열(67)씨 “효리초등학교 선배님이자 지금은 우리 형수님아닙니꺼~”라며 살짝살짝 곁눈질을 보내며 호탕하게 웃던 김종열(67) 어르신. 바로 그 옆에서 마치 ‘잘해라’라고 신호를 보내는 듯한 양기열 노인회장의 아내이자 김종열 어르신의 선배인 정춘상(68) 어르신. “효리초가 폐교된 지 20년이 넘었어도 나는 3회, 형수님은 1회 졸업생이잖아”라며 “한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지! 그래서 난 지금도 여기 회관에서 막내야”라고 김종열 어르신은 천상막내인 투정을 다 부린다.그 말에 “하하하~” 웃음을 터뜨린 정춘상 어르신은 “여기는 예부터 양씨 집성촌이야. 나도 여기가 고향이니까, 뭐 시집도 윗집에서 아랫집으로 소풍 오듯이 온 거지” 한다. “그땐 다 그랬어~ 옆집 친구가 동서도 되고~ 형수도 되고”라며 옛 시절을 회상하던 어르신의 눈에 구라마을에서 남계마을로 소풍 오듯 시집 온, 23살의 꽃다운 아가씨가 보인다. “여긴 인심도 좋지만 수동출신 인재들도 많아! 군수후보도 나오고~ 군의원 후보도 나오고!”라며 그는 마지막까지 마을자랑도 놓치지 않는다.    ‘은산해운항공’ 양재생 대표 실학유학의 1번지 남계서원에서 주경야독을 하며 꿈을 향해 나아가는 청년이 현대시대에도 있다면 바로 양재생 대표가 아닐까? 수동 출신 기업가 은산해운항공(주) 양재생 대표는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 농사일을 하며 학업에 전념해야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늘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과 신념으로 노력해 지금은 존경받는 기업가로 성공했다. 그는 어렵게 공부하는 후배들을 위해 수동중학교 장학금 지원, 남계마을과 금호마을 자매결연을 통한 어버이날 경로행사 및 각종 체육행사 지원, 그 외 함양군 장학회 및 수동면 발전을 위한 발전기금 등 수많은 기부를 통해 고향사랑을 지금도 표현해오고 있다. 특히 양 대표는 고향에 대한 애정을 담아 마을회관을 짓는데 기부를 함은 물론 마을주민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마을회곤 앞에 ‘은산공원’을 조성하기도 했다.양 대표는 작년 11월 부산상공회의소 주최 ‘제35회 부산산업대상’ 시상식에서 부산지역 상공업 진흥과 탁월한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경영부문에서 ‘대상’을 차지했다.관광명소 ● 남계서원 유생들의 놀이터 조선 초기 성리학자이며 동방5현으로 불리는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기 위해 1552년 ‘개암 강익’을 비롯한 지방 유생들이 건립했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서원으로 1566년 명종 임금에게서 하사받은 사액 서원이다. 출입문인 풍영루와 강당, 동재, 서재, 경판고,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급한 경사지에 사당을 제일 높은 곳에 두고 출입문까지 일직선상으로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식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이다. 남계서원은 정유재란(1597년)때 소실됐으나 1612년 현재 자리에 다시 세웠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헐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 하나이다.● 청계서원 경남문화재 제56호1907년 청계정사가 있던 터에 세워진 서원으로 ‘탁영 김일손’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향사를 지내고 있다. 김일손은 성종 때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으나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희생됐다. 그가 이곳 청계정사에서 한 동안 공부를 한 적이 있어 유림에서 그 터에 서원을 세운 것이다. 서원의 건물은 중앙에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의 강당과 그 뒤쪽 높은 지대 위에 청계사, 강당 앞으로는 학생들이 거처하던 동재인 구경재와 서재인 역가재가 있다. 경내에는 ‘탁영김선생유허비’와 네모난 연못이 있다.옛 이야기 ● 도깨비 장난치던 맞바위“도깨비는 장난을 참 좋아해. 한번은 마을에서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거야, 온데간데없는 사람을 찾아 나섰지. 온 동네를 뒤지다 맞바위까지 오게 된거야. 맞바위 아래는 아주 널찍한 바위가 깔려있어. 그 바위 아래 작은 틈새가 있거든. 아니 세상에, 근데 사라진 그 양반이 그 틈새에 끼어 있지 뭔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이유도 없었어. 그냥 도깨비장난에 놀아난 거일 수 밖에”맞바위를 자세히 보면 바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예부터 맞바위 글자가 새겨진 방향의 마을은 부자가 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런 전설 때문에 강 건너 곰배마을 사람들이 맞바위를 곰배마을로 향하도록 바꿔놓기도 했다. 남계마을 사람들은 돌려놓은 맞바위를 다시 제자리로 해 두고 고정을 시켜 지금은 맞바위가 남계마을을 향해 우뚝 솟아 있다.남계마을 사람들의 맞바위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맞바위에 대한 전설은 또 있다. 맞바위 아래 큰 바위는 절대 깨면 안 된다, 행여 바위에 손을 대면 큰 해를 당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새마을운동 시절 길을 내면서 맞바위를 깨부쉈던 사람이 운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바위를 깨서 목숨을 잃은 것이라 입을 모았다.길에서 만난 사람 ● ‘옛 추억에 잠기다’ 양화용씨 “내가 벌써 이 나이가 됐나? 취재 온 그대들 덕분에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 남계마을의 숨겨진 명소이자 마을의 자랑거리인 ‘맞바위’을 얘기하던 양화용(83) 어르신. 양화용 어르신은 맞바위 옆에 우뚝 서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가 내 나이 10대에는 내 키보다 작았는데 이렇게나 자랐네”라며 “아직도 눈에 선한 게.. 지금은 80이 된 노인이지만 그 땐 아리다운 아가씨였던 한 여인이 떠나가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 나무를 쓰다듬고 있었지”라며 생생했던 그 장면을 떠올렸다.맞바위가 있는 이 길목은 읍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 길을 건너 읍으로 나무를 팔러 다녔고 소를 팔러 다녔다. 맞바위가 있던 이곳은 예전에 물이 흘러 마을사람들의 놀이터였으며 소풍장소였다. 더운 여름 밤마실을 나와 바위에 누우면 따뜻한 온기가 몸에 전해졌다. 이곳은 고래, 지프차, 비행기 닮은 바위들이 늘려있던 곳이기도 하다.젊은 시절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맞바위가 지금은 풀숲에 가려져 있어 어르신은 마음이 편치 않다. 남계마을 앞으로 큰 길이 나면서 맞바위로 건너오기가 더 어렵게 됐다. 시간이 흘러 어르신의 기억은 희미해져도 맞바위의 추억은 더욱 생생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정세윤·박민국·하회영·이혜영·유혜진·차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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