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 원장님이 어떻게 해드릴까요? 하길래 그냥 짧게 잘라 달라했다. 근데 아무리 내가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이건 아니다. 그럼 짧게 자르겠습니다~ 하고 가위를 들이댈 때만 해도 네~ 했는데 막상 웃자란 잔디 깍듯 듬성듬성 잘라 낼 때는 아차 싶었다. 나는 “어~어~ 이건 아닌데 너무 짧은데... 머리숱도 많지 않은데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중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한 말이 있어 그냥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나는 에라이~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 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머리를 감고 드라이기로 물기를 말리는데 어찌나 짧게 밀어 놓았던지 두피가 다 뜨겁다. 이 정도면 군대 입대해도 이상해 보이지 않겠다.
어쨌든 자른 머리 물릴 수는 없고 염색은 집에서 직접 했다. 머리숱이 별로 없으니 염색약이 얼마 안 든다. 물도 샴푸도 절약모드다. 앞머리 옆머리 대충 쓱쓱 묻히고 뒤 꼭지가 잘 안보여 아내에게 좀 발라 달라 했더니 귀가 시커멓게 되도록 묻혀 놓았다. 좀 일찍 발견했더라면 쉽게 지웠을 텐데 뒤늦게 보고 지우려니 잘 안 지워진다. 다급한 마음에 이태리 타올로 박박 문질렀는데 귀때기만 시뻘겋게 되었다. 백작부인에게 아침 인사해야 하는데 이거 참 난감하다. 귀때기가 시커먼 남자가 “백작부인~ 좋은 아침입니다~”하고 인사하면 깜짝 놀랄 텐데 말이다.
오월 아침마당에 백작약이 눈부시고 뒷산 뻐꾸기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오늘 같은 날은 농부도 시인이 된다. 농부는 농비가 내린다고 쓰고 시인은 꽃비가 내린다고 읽는다. 백작약이 피었다고 쓰고 백작부인~ 좋은 아침입니다~ 라고 읽는다. 창가에 덩굴장미는 뻐꾸기 울음소리만큼 벌어지고 있다. 뻐꾸기 시도 때도 없이 울고 향기로운 장미 여기저기 정신없이 피는 걸 일일이 다 세어보지는 못하지만, 퉁 치면 얼추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 창을 활짝 여니 장미향이 훅하고 들어온다. 아침저녁으로는 향기가 숙성이 되어 더 달콤한 거 같다. 봄비에 떨어진 장미 꽃 이파리가 아깝다며 아내가 한소쿠리 주워 오니 거실은 금세 향기의 바다가 된다. 소쿠리는 향기의 바다에 떠 있는 장미 섬이다.
마당엔 지금이 꽃이 제일 많을 시기다. 연중 가장 좋은 계절이라는 말이다. 무더기로 피는 클레마티스는 꽃의 은하수, 작약은 꽃의 태양, 알리움은 꽃의 지구다. 화단 한구석에 비올라 한포기 마저 풍성하게 꽃을 피운다. 비올라는 지난 삼월 꽃이 없을 시기에 제일 먼저 꽃을 피우더니 여태 피고 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것도 지난 해 떨어진 씨앗에서 자연 발아된 거라 참으로 기특하다. 농부가 허리 숙여 감사하고 공손하게 다가가 보니 꽃이 풍성할 뿐만 아니라 무늬도 다양하다. 세어보니 놀랍게도 꽃 색이 한 옥타브다. 이런 날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내려와 비올라협주곡을 지휘해도 나는 결코 놀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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