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수년 전 집 뒤 산비탈 밭에 고구마를 심었다가 손님이 내려오는 바람에 망한 적이 있다. 여름철 고구마가 겨우 새끼손가락만 하게 달리기 시작했는데 손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고맙습니다(고구마 맛있습니다) 하고 내려와 파티를 하는 것이었다. 마당에 개가 5마리나 있었으니 조용할 리가 없었다. 밝을 때는 개를 데리고 올라가서 고구마를 지킬 수 있었지만 밤에 오는 손님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그해 고구마 농사 망하고 그 뒤로 고구마 심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개집 옆에 손바닥 발바닥만한 텃밭을 만들어 호박고구마를 심었다. 불청객 산돼지는 고구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마을 안에 있는 밭에도 고구마만 심으면 내려오는데 설마 개집 옆 마당까지 내려오지는 못할 것이다. 13년 전에 쓴 일기가 있어 다시 읽어보는데 흐흐 웃음이 나온다. 어제는 산기슭 고구마 밭에 손님이 와서 무척 당황했다. 고구마를 수확하려면 늦가을 무서리를 한두 번 맞혀야 하는데 한여름 장마철에 산돼지가 내려올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원래 여름이 끝날 무렵 사냥개 한 마리를 고구마 밭으로 파견할 생각이었는데 뜻밖의 상황에 어제는 종일 허둥지둥 했다. 어제 늦은 밤에 손님이 내려오는 걸 코시가 눈치 채고 맹렬하게 짖어대는데 울타리 문만 열어주면 당장 뛰어 올라갈 기세였다. 보름째 이어지는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애써 심은 고구마 밭에 불청객이 헤집고 다니는 걸 알면서도 나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람과 개쯤은 두려워하지 않는 산돼지들을 깜깜한 밤에 비까지 맞으며 올라가서 물리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오늘 아침 쑥대밭이 된 고구마 밭을 보고는 어제의 나약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애써 가꾼 먹거리를 더 이상은 뺏길 수 없다는 생각에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결심했다. 읍에 나가서 랜턴도 사오고 굵은 대나무 창도 만들었다. 그리고 전투의 선두에 서게 될 래시와 코시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저녁은 특식으로 고기를 먹였다. 원래 우리 가족이 먹으려고 샀던 고긴데 아내가 짐승은 고기를 먹여야 용감해 진다며 특별히 구워 주었다. 준비는 완벽했다. 산돼지가 새끼들을 거느리고 내려오면 코시가 냄새를 맡고 맹렬히 짖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헤드 랜턴에 대나무 창을 들고 용감한 코시와 래시를 앞세워 산으로 뛰어 올라갈 것이다. 그러면 손님들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는 것이 준비된 시나리오인데 유감스럽게도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분명 손님이 올 시간인데 개들은 깊은 잠에 빠져있다. 낮에 산돼지 쫓는 훈련하느라 체력단련을 해서 피곤한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특식을 너무 많이 먹인 것 같다. 고기를 먹여야 용감해진다고 해서 더 용감해지라고 배불리 먹였는데, 이것들은 코까지 골며 늘어지게 자고 있고 열린 창으로 개구리 울음(웃음)소리만 요란하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댓글0
로그인후 이용가능합니다.
0/150
등록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복구할 수 없습니다을 통해
삭제하시겠습니까?
비밀번호 *
  • 추천순
  • 최신순
  • 과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