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을 지켜 본 국민들은 아직도 그 순간의 감격을 잊지 못하고 있다. 물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는 보는 관점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환영 일색의 분위기다. 특히 속초 ‘아바이마을’ 주민들을 비롯한 실향민들과 이산가족들에게는 더 없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그날의 회담장 분위기와 만찬 분위기는 마치 통일이 이루어진 듯 정겨운 분위기였다. 이번 회담이 성공적으로 진행 된 데에는 회담을 준비한 문재인 대통령의 세심한 배려나 북측 김정은 위원장의 허심탄회한 태도가 한 몫을 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한 발 더 나아가 우리 대한민국의 뛰어난 문화적 수준이 곳곳에서 배어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언론에서는 연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고 보도를 하고는 있지만, 어찌 화기애애하기만 했겠는가? 남한도 그렇고 북한도 그렇고 나라의 운명을 등에 지고 나온 두 정상들이 만나는 회담인데, 모든 의제들을 그냥 웃어넘기기만 했겠는가 말이다.
정치엔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도 김정은 위원장이 남북 정상 회담을 수락하고, 회담 내내 모든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이기까지 한 데에는 북한 내부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핵을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풀릴 줄만 알았던 북한 당국자들에게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큰 변화가 필요했을 것이고, 마침내 벙커 안에 숨어 있던 최고 지도자가 얼마나 급했으면 선글라스도 없이 햇볕 아래로 나왔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런 북한 당국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기대 이상의 카드를 꺼내 든 것은 나름대로 그들만의 치밀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마침 문재인 대통령의 통치 철학이나 이념이 북한쪽에 거부감을 덜어주었고, 게다가 그런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초기이고, 앞으로도 정권이 계속 이어져 나갈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듯하다. 아마도 김정은 위원장에게는 다가오는 북미 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적인 협력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이렇든 저렇든 이번 남북 정상 회담을 두고 김 위원장의 행동에 대한 미담들이 여럿 나오고 있다. 남북 군사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첫 만남을 할 때의 모습은 두고두고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되었다. 군사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두 정상이 악수를 하고 난 뒤에 김 위원장이 남측으로 군사 경계선을 넘어온 것도 그랬지만, 문 대통령이 “나는 언제 북쪽으로 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선뜻 “그럼 지금 넘어 오시죠!”라는 말과 함께 둘이 손을 잡고 군사 경계선을 넘어서 깜짝 월북한 사건은 잊을 수 없다. 이는 김정일 위원장이 보여준 즉흥적인 성격과 더불어 그의 재치와 여유를 보여준 것이었다.
또한 회담 중에 문 대통령이 북한 땅을 통해서 백두산에 올라가고 싶다는 말을 하자 북한의 열악한 교통 사정을 솔직하게 언급하면서 남한의 고속철도에 대한 부러움을 드러낸 것도 김 위원장의 성격 때문인 것으로만 말할 수 없다. 김 위원장의 솔직하고 숨김없는 태도 덕분에 남북 철도 연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고, 앞으로 북한에 대한 토목건설 투자가 이어지게 되리라고 기대가 벌써부터 나오는 것은 김 위원장의 대화를 풀어가는 특유의 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위원장의 이런 태도는 앞으로 자유로운 남북 왕래까지 실현될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한편, 남북 정상들은 배석자들 없이 단 두 사람이 함께 산책을 하면서 가슴 속의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두 정상이 산책 중에 나눈 대화가 공개된 정상회담 선언문 이상의 말들이 오가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하게 된다. 산책 도중에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때로는 호탕하게 웃는 모습도 찍혔고, 때로는 심각하고 진지한 모습도 카메라에 잡혔다. 같은 민족으로서 미국을 비롯한 중국과 러시아, 일본 등 외세에 대처하기 위한 서로간의 조언과 함께 협력의 대화가 오갔을 것으로 보인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머리를 맞대고 가정사를 의논하는 것 같은 이 모습에서 필자는 더 큰 감동을 느꼈다.
아닌 게 아니라, 만찬장에서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 그리고 김정숙 여사와 이설주 여사가 마주 선 것을 보면 영락없이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선 아들과 며느리의 모습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아들이 김 위원장 보다 두 살 아래라고 하니, 82년생인 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기가 죽을 법도 했지만, 그는 북한 최고지도자로서의 품위와 체통을 잃지 않았다. 회담 내내 김 위원장의 모습에서 평소 몸에 배어있던 카리스마를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마술 쇼를 관람할 때의 김 위원장의 모습은 영 달랐다.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맑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스위스 유학파라는 사실도 이번 회담의 성공을 가져온 중요 요인으로 꼽힌다.
필자는 김 위원장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역시 지도자는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나이나 여건에 상관없이 당당함을 잃지 말아야 함을 배웠다. 또 때로는 자기의 신념이나 이념 따위도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고 수용하는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특히 두 정상의 마음을 열게 했던 평양냉면 이야기라든가, 회담장에 걸린 서로 다른 남북한 시간을 가리키는 벽시계 두 개, 평화의 집 1층 로비에 걸린 북한산 그림, 1층 환담장에 걸린 ‘천년의 동행, 그 시작’ 2층 회담 장소에 걸린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 3층 연회장에 걸린 ‘서해, 두문진에서 장산곶’ 등은 무언가를 말하는 그림들이었다. 그리고 의미를 담은 식사 메뉴들..., 이 모든 것들이 서로의 마음을 여는 도구가 되었고, 대화를 풀어나가기 위해 동원된 커뮤니케이션 공학의 결실이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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