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 막내딸이 “오늘은 학교에서 총동창회가 열리는 날인데 개회식 때 축하공연으로 재학생들이 사물놀이를 한다”고 하였다. 연습을 해야 한다기에 학교에 태우고 갔는데 학교 주변에는 벌써부터 모인 사람들의 차량으로 인해 매우 혼잡하였다. 올 해 97세 되신 이웃마을 어르신과 같이 차에 타고 있었는데 그 분은 이 초등학교의 7회와 14회 졸업생이라고 하였다. 졸업을 왜 두 번이나 하였는지 설명을 해 주셨는데, 그 당시 처음에는 초등학교가 4년제라고 하였다. 입학을 해서 4학년을 마치고 졸업을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초등학교가 6년제로 바뀌어서 다시 2년을 더 공부하고 졸업을 하였다고 하셨다. 당시에는 일제 강점기 시대라 교장이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일제 말에는 학교에 등교를 해서 한국말을 사용하면 벌금을 내게 하였고, 그 당시 금액으로 3전 이었는데 적은 액수가 아니어서 학교에 들어서면 대부분 일본말을 잘 하지도 못해서 아예 입을 닫고 학교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식민지 생활의 애환을 들으니 가슴이 쓰리기도 하면서 나라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있었던 일화를 하나 얘기해 주었는데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는 학교에 가는데 동네 이웃집 아저씨가 딱지를 사오라고 돈을 주었는데 그 당시에는 편지봉투에 붙이는 우표도 딱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동그란 종이로 된 딱지도 있어서 가게에 가서 초등학생이 딱지를 달라고 하니까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딱지 30장을 가게 주인이 주었다고 한다. 딱지 30장을 들고 집에 가서 심부름 시킨 분에게 가져다주니까 우표딱지를 사오라는 것이었는데 장난감을 사 왔다고 하시면서 그냥 그 딱지를 가지라고 했다고 한다. 그 당시의 훈훈한 정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지금 같았으면 심부름을 제대로 못했다고 야단을 맞거나 다음 날 다시 바꾸어 오라고 했을 텐데 그 딱지를 그냥 가지라고 하였다니 후덕한 아저씨였던 것 같다.
오후에 차를 몰고 필자가 다녔던 초등학교 모교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 학년에 40여명 전교생이 200명이 넘어 시끌벅적했던 학교가 지금은 적막한 폐교가 되어 버렸다. 학교 담장을 따라 도로 쪽으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오래된 3그루의 벚나무에는 그 예전처럼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따사로운 봄빛에 반짝거리는 분홍빛깔 고운 꽃잎들이 봄바람에 하늘거리며 따뜻하게 맞아주는 듯하였다. 40년 전 초등학교 생활이 주마등처럼 아련히 스치고 지나간다. 지금은 어느 외지인이 그 학교를 매입해서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교문을 꽉 닫아 놓아서 들어가기도 부담스럽다. 필자는 지금 고향을 떠나 천안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주말마다 집으로 내려오는데 차를 타고 고향 입구에 있는 산마루에 올라서면 고향산천과 마을이 눈에 들어오면서 마음이 포근해진다. 집 마당에 들어서면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다. 고향이 그렇듯이 학교도 초등학교가 가장 정이 많이 가는 것 같다. 6년이라는 긴 기간도 있겠지만 처음 학교생활이고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이라 더 그런 것 같다. 폐교가 된 학교 앞을 지날 때마다 한편 마음이 아린다. 교실 앞 잔디밭에 드러누워 따사로운 햇볕을 맞으며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 시절을 추억하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살아가나보다. 학교는 폐교가 되고 건물은 바뀌어도 어릴 적 뛰어놀던 추억은 마음 속 깊이 새록새록 새겨져 있는데 한번 씩 폐교가 되어 흐트러진 체 적막감만 흐르는 모교 앞을 지날 때마다 왠지 모를 쓸쓸함이 밀려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본다.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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