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는 역사의 초고다”
영화 <더 포스트>는 관객에게 묵직한 이 한 문장을 선사하면서 ‘뉴스는 종교를 대체한다’는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떠올리게 했다. 뉴스는 매일 일어나는 사건들의 최초기록이다. 저널리스트들은 사전적으로 ‘고도의 지식과 기능,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취재하고 편집하며 보도하는’ 사람들이다. 언론을 ‘제3’ 혹은 ‘제2의 권력’이라는 수사를 붙이고 있지만 언론에게 가해지는 더 큰 권력의 압박은 유착관계를 형성하느냐, 대원칙에 입각하여 사명감을 가지느냐,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한다.
<더 포스트>는 이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의 고심과 갈등을 그린다. 희생과 위험을 감수하고 ‘펜타곤 페이퍼(미국방부 기밀문서)를 특종으로 보도하느냐, 침묵함으로써 회사의 안전을 도모하느냐의 갈림길이 캐서린의 결정에 달린 것이다. 펜타곤 페이퍼는 베트남전 참전계기가 된 ‘통킹만 사건’의 조작과 미국의 역대정권(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등)이 베트남 공산주의를 와해 시키기 위해 어떻게 개입했는지가 담긴 기밀문서다.
뉴욕 타임즈(NYT)는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함으로써 승산이 없는 베트남전을 ‘승리하고 있다’며 국민을 우롱한 사실을 알려 ‘보도금지’의 소송에 휘말린다. 워싱턴 포스트(WP)의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는 어렵게 입수한 이 기밀문서로 후속보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론사주 캐서린의 결정에 회사의 명운이 걸리자 관계자들의 분분한 반대가 이어진다. 거센 반대와 위기는 판단을 흐리게 하고, 결정을 머뭇거리게 하며, 전후좌우를 살피게 한다. 남성임원들이 늘 무시했던 여성경영인 캐서린 그레이엄은 결정적인 순간에 신문의 사명이 명시된 조항을 일깨우며 신문발행의 결단을 내린다.
영화관을 나오며 스티븐 스필버그가 새삼스럽게 베트남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싶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캐서린 그레이엄을 내세워 여성문제를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언론의 자유나 사명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국의 저널리스트들은 이 영화를 관람하고 자신을 되돌아보았는지, 네티즌의 댓글로 기사를 작성한다는 질타와 기레기라고 부르는 대중의 냉소주의에 대해 어떤 인식을 할것인지. 임원의 사태를 요구하고 공정보도를 외치던 MBC와 KBS의 파업사태가 보여준 언론의 현실도 떠올랐다. Jtbc의 태블릿PC 보도와 세계일보의 청와대 비선실세 보도, WP가 폭로한 워터게이트 사건도 스쳐갔다. 보도과정의 긴박함이나 비하인드를 독자(시청자)들은 모른다는 것도 생각했다.
실화인 <더 포스트>의 저널리스트들은 정의로워 보였다. 한국의 저널리스트들도 그들처럼 정의로울까? 그들도 역사의 초고가 되는 뉴스를 생산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가? NYT와 WP가 소송에 휘말렸을 때 타 신문들이 그들을 옹호하던 것처럼 언론의 사명을 위한 연대가 가능한가? 언론이 보도지침을 어기면서 사회에 대한 비판기능을 작동하기는 어렵고, 법조인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다른사람의 죄를 묻는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일이다. 자극적이고 편향적인 뉴스를 생산할 때 대중들은 언론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
직함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은 품격이다. 그가 누구인가를 모든 사람들이 알고있고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클 때 이 품격은 더 크게 요구된다. 종교가 되어버린 뉴스는 그래서 더욱 엄격해야 하며 본분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뉴스가 권력이 되면 품격은 잃어버린다. 캐서린 그레이엄의 말처럼 언론은 국민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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