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부터 책장 정리 한번 해야지 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엊그제 아내가 그 일을 시작했다. 수천 년 또는 수백만 년 자리만 차지하고 손 한번 닿지 않았던 책이 칠할 이상은 되어 보인다. 과연 아내가 먼지 폴폴 날리는 책을 한권 한권 내리는데 책장의 칠 할이 비었다. 일단은 시원하다. 사실 우리 집엔 책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아니 없는 편이다. 나도 아내도 독서를 즐기지만 책을 사서 읽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읍에 있는 도서관에 가면 책을 여덟 권까지 보름간이나 대출을 해주기 때문에 대부분 빌려서 읽고 있다. 전화 한 통화면 한 주 더 연장도 해준다. 읽고 싶은데 도서관에 없는 신간도서는 희망도서 신청을 하면 고맙게도 구입까지 해주기 때문에 굳이 돈 들여 사지 않는다. (아주)간혹 특별히(꼭) 소장하고 싶은 책을 제외하고는 잘 사지 않으니 나는 출판업계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근데 아이러니한 고백이지만 나는 도시에 살 때 서점을 몇 년 한 적이 있다. 영어전문 서점이었는데 그 때 나는 사람들이 책 구입에 인색하다고 항상 불만이 많았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내로남불인 것이다.
근데 정리해서 내려놓은 책의 처분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이다. 그래도 책인데 폐지 버리듯 처분할 수는 없고 도서관 같은데 기증을 하자니 나도 안 읽는 책을 누가 기꺼이 받을 까 싶다. 요즘 도서관은 재정상태가 좋아 신간이 꾸준히 들어온다. 지금 읍에 있는 도서관은 리모델링 하느라 난리법석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 그 돈으로 신간을 구입하면 더 아름다운 도서관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어쨌든 바래고 거시기한 책은 버리고, 상태가 괜찮아 남에게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은 SNS에 올려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면 보내주려고 재분류를 해보았다. 그랬더니 다섯 권 중 한 권은 거의 새 책이다. 베르나르의 <웃음>은 아주 새 책이다. 베르나르를 좋아하는 큰 아들이 산 거 같은데 나도 안 읽은 거 같아 일단 이건 내가 먼저 읽어봐야겠다. 마크 해던의 <한 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은 수년 전 책 구입에 인색한 내가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신간을 구입해서 읽었던 거다. 아마 어디서 신간 소개를 읽고 엄청 재밌다는 꼬임에 충동적으로 주문한 것 같다.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재밌게 읽었었다. 나도 이제 연식이 오래되다 보니 예전에 읽었던 책이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래서 요즘 도서관에서 한번 대출했던 책을 다시 대출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재분류한 책 중에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는 다시 읽으면 처음 읽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읽을 수 있을 거 같다.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서울 편을 두 권 빌려 재밌게 읽었는데, 제 1권 남도문화 답사기부터 다시 한 번 읽어볼까도 싶다.
이제 봄기운이 완연해서 새 책 같은 헌 책 <웃음>을 들고 앞마당으로 나갔더니 부지런한 아내가 돌담 아래에서 달래를 캐고 있다. 돌담 주변과 화단엔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과 검불이 이불처럼 덮여 있었는데 아내랑 며칠 째 걷어내고 나니 집 주변이 깔끔하다. 화단에는 어느새 새 순으로 가득하다. 앵초, 아네모네, 매발톱, 디기탈리스, 수선화, 튤립, 크로커스가 경쟁적으로 순을 올리고 있고, 돌담 아래엔 작약이 검붉은 손을 막 벌리고 있다. 기분 좋은 봄 햇살에 아내랑 흔들 그네에 앉아 차를 마신다. 새봄을 맞아 책장도 정리하고 집 주변도 정리하고 나니 일단은 시원한데 왠지 섭섭하기도 하다. 문득 내 인생의 칠 할이 비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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