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상여를 기억하십니까?
화려한 형형색색으로 치장된 상여가 상여꾼의 구슬픈 곡소리와 함께 발인을 하고 장지에서 하관을 하고 타고 갔던 상여와 고인이 입었던 옷들을 무던 근처에서 태우던 예전의 장례식 풍습은 이제 우리에게 먼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절차들로 인해 산불도 나곤 했던 장례풍습의 광경들은 환경보호라는 이유로 이제는 거의 사라진 장례문화입니다.
누구나 한번은 맞이해야 하는 죽음이지만 세상에 호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안타까운 죽음이 제 지인 중에서 있었습니다. 벽제화장장에서 화장을 했었는데 수십여 대의 운구차가 늘어선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 곳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매일 수 십구의 화장이 치러지고 있다고 합니다.
수많은 주검들이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에 두어줌의 재로 변해 나오는 그 곳. 그 경황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사람이 죽으면 수의를 입히고, 관에 시신을 넣어서 장례를 치를까? 인간의 존엄성 때문일까? 아니면, 죽음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일까?
그렇다면, 장례식장에 샘플로 비치된 수의랑 관은 대부분이 중국산이고 그 가격도 천차만별인데 그 또한 모순은 아닌가?
시신은 그 수의에 입혀지고 관에 넣어져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지게 될 터인데 환경보존을 외치며 살던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대부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굳이 수의로 겹겹이 두르고 화장지를 넣고 유품을 넣고 아름드리나무로 만든 관을 같이 태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평소에 입던 옷 중 가장 깨끗한 옷을 입히고 화장을 하면 어떨까? 그 옷을 입은 채로 화로에서 한 줌의 재가 되는 편이 더 존엄하지는 않을까? 아니면 차라리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화장하는 것이 더 평등하지는 않을까?
관 한 개를 만들기 위해 베어져야 하는 아름드리나무와 그 부속품들로 인해 무너지는 환경은 또 누가 감당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에 화장장이 이곳 한 곳 만은 아닐 텐데... 수십 년 아니, 백여 년 가까이 자란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루에도 수백그루씩 이렇게 사라져가야 하는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중에 고인은 어느덧 한줌의 재로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파주의 한 납골당에 모시는 것으로 장례의 절차는 모두 끝이 났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런저런 모습으로 참 혼란스럽고 혼란스러워져 갑니다. 죽음 앞에서 다시 한 번 겸허해지는 것은 저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그런 겸허한 모습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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