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있겠다, 돈 빌리러 안다니면 됐지, 이만하면 부자 아닌가?”
함양군 안의면 토종약초시장 인근 석천길에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 지어진 듯한 집들이 옛 정취를 물씬 풍기며 옹기종기 모여 있다, 최근 건축된 현대식 집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이곳 삼거리 코너에서 33년을 뻥튀기 기계와 씨름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을 만났다. 최해동(63)씨다.
최씨는 대뜸 “나는 <인간시대>에 나와야 하는 데”라며 뼈 있는 농담으로 복선을 깔았다. 그는 “머리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끼도 많은데 무엇 하나 뜻대로 해본 게 없다”며 “한때는 원망도 많이 했고 내 인생이 원망스러운 때도 있었다”고 했다.
“나는 한(恨)이 많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이제 환갑도 지났고 아들 둘 장가가서 손자 손녀를 품에 안겨주니 모든 게 다 눈 녹듯 사라지고 더 없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와 여유가 넘친다.
“내 인생도 뻥튀기요. 행복도 뻥튀기다”는 최씨는 “너무 어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고 했다. 20대 젊디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마저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지금은 천석꾼도 만석꾼도 부럽지 않다”는 최씨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친구들이 책 보따리 들고 국민학교에 입학할 나이에 최씨는 더부살이를 시작했다. 8세부터 책가방이 아닌 망태기를 메고 꼴을 뜯었다. 이것저것 온갖 심부름을 하며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끼니를 얻어 어머니와 둘이서 주린 배를 채웠다.
외동아들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라야 할 나이에 갖은 고생을 하며 열아홉살 때까지 남의 집 살이의 연속이었다. 19세가 되자 주인집 어르신이 안의중학교 근처에 25만원짜리 오두막집 한채를 마련해 줘 어머니와 함께 그곳에서 생활했다. 최씨는 “뻥튀기 보조 고물상 등 먹고살기 위해 안해 본 일이 없다”고 한다. 최씨는 부산에 직장을 구해 타향살이를 선택했다. 신발공장에서 5년을 일하면서 아내(58)와 사랑에 빠졌다. 어려운 형편이라 결혼식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내는 큰아들을 임신해 직장을 그만둘 처지가 됐다. 혼자 벌어서는 태어날 자식까지 먹여 살리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최씨의 선택은 귀향이었다.
서른세살 때 부산 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했다. 예전에 배웠던 뻥튀기 기술로 생계를 꾸릴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직장생활을 하며 모았던 전 재산을 털어 방한칸짜리 전셋집을 구하고 나머지 돈으로 뻥튀기 기계와 경운기를 샀다.
당시만 해도 안의에만 뻥튀기 점포가 7~8군데나 돼 설자리가 없었다. 뻥튀기 기계를 경운기에 싣고 동네마다 찾아다니며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3년 동안 배운 기술로는 제대로 된 뻥튀기를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새까맣게 태워서 물어주고, 제대로 안튀겨져서 물어 주고 돈을 번 게 아니라 쌀값 물어주기 바빴다”면서 “이 일도 7년은 해야 실수하지 않고 손님이 원하는 대로 튀겨 낼 수 있다”고 했다. “직장구하기도 힘들고 젊은 나이에 퇴직해 기술을 배우겠다고 젊은 친구들이 가끔 찾아오는 데 일주일도 못버티고 간다”며 “보는 것처럼 만만한 일이 아니다”고 한다.
최씨도 실수를 거듭하며 10년 넘게 떠돌이 뻥튀기 장사를 하다 안의시장에 자리를 잡았다. 한때는 5일장이 열리는 날이나 설 대목을 앞두고는 하루 12시간을 꼬박 일해도 다 튀겨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 사람이 태반 일만큼 손님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는 재미났지”라며 “내가 처음 뻥튀기를 시작했을 때 안의시장에 뻥튀기가게가 여섯군데나 됐다”는 최씨는 이제 유일하게 “뻥이요”을 외치며 안의전통시장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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