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에 소리를 불어 넣으면 악기가 된다.”방짜징 전수조교이자 지난 12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은 이점식(61) 함양방짜유기장의 말이다.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받아이점식 유기장의 공방은 함양군 서하면 서상로 28에 있다. 서상면과 서하면의 경계지점인 일명 꽃뿌리다. 이곳에는 함양징터라는 기념비가 서 있다. 바로 맞은편이 이점식 대표가 함양징과 함양유기의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운영하는 ‘함양방짜유기’ 공방이다. 공방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꽤 큰 공장이다. 이곳에는 전통방식 작업장과 현대식 공장이 공존한다. 3000여평의 부지에 사무동과 기숙사까지 갖추고 있다.
현대식 공장에는 수저세트, 식기 등 방짜유기나 징, 꽹과리 등 모든 제품을 만든다. 전통방식 작업장은 징이나 꽹과리 등 악기를 주로 만드는데 전통방식의 방짜교육을 위한 교육장으로도 활용된다. 교육생 중에는 이 대표의 두 아들을 비롯해 20대에서 50대까지 연령층이 다양하다. 현재 교육생은 모두 8명이다. 교육생을 제외한 함양방짜유기 직원들은 모두 20명이다.
이 대표가 이곳에 터 잡은 것은 함양방짜유기, 특히 꽃뿌리징 또는 안의징으로 불렸던 함양징을 복원하겠다는 의지이자 자신과 부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그동안 거창에서 방짜공방을 운영해 왔다. 이 대표가 이곳에 터를 닦기 시작한 것은 2012년이다. 함양유기의 명성을 복원하겠다는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이 대표는 5년 이상 준비한 끝에 지난해 말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간 것이다. 함양방짜유기 본고장 꽃부리이점식 대표는 이곳에서 태어난 오부자(부친과 4형제)의 장남이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곳 꽃부리에만 방짜징을 만드는 공장(공방)이 두 곳이나 있었고 인근 서상, 서하, 안의에 모두 16곳의 방짜공장이 있었는데 이후 산업화 등으로 함양징의 명맥이 거의 끊겼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창때는 30개가 넘는 공방이 성업했을 만큼 함양징과 유기는 전국에서도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경제성장과 생활환경 변화로 유기점들이 점차 사라져 지난 1986년 이곳 꽃뿌리에 있던 유기점이 문을 닫으면서 함양 방짜유기의 맥이 사실상 끊어졌었다.
그런 함양징의 명맥을 이은 장인이 바로 이 대표의 부친 이용구(83) 옹이다. 이 대표의 부친은 이곳에서 16살 때부터 방짜징 제작 기술을 배워 평생을 방짜징을 만든 경남 무형문화재 제14호 ‘징장’이다. 꽃뿌리에서 징 만드는 기능을 익힌 이용구 옹은 1967년 안의중학교 앞에 공장을 차렸다. 안의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이 대표도 틈틈이 아버지의 공장에서 징 만드는 일을 도왔다. 100% 수작업으로 진행되던 방짜징 제작과정이 기계화 되면서 방짜징은 오히려 쇠퇴기를 맞았고 부친의 공장도 6년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이 대표가 중학교 졸업을 앞둔 1973년 12월 안의공장을 정리하고 부친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이 대표는 서울에서 징 만드는 기술을 아버지로부터 본격적으로 전수 받기 시작했다. 군대생활 3년과 해외생활 1년을 제외한 나머지 40여년을 놋쇠와 씨름하며 1200도가 넘는 용해로 앞에서 고단한 나날을 보냈다.
‘방짜 부자’ 무형문화재 탄생2005년부터는 유기장에게 방짜유기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렇게 쌓은 기술로 그는 함양방짜유기 경남 무형문화재 보유자라는 인정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비록 지방무형문화재이기는 하지만 이는 경남 유일의 방짜유기장이면서 우리나라서 3명뿐인 유기장에 이름을 올린 것이어서 그 의미가 크다. 더욱이 다른 유기장들은 북한식 방짜유기 보유자이지만 이 대표는 남한식 전통 방짜유기 보유자라는 점에서 그 가치 또한 남다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남한식 방짜유기 무형문화재 보유자는 이 대표가 유일하다고 한다. 원로 하신 이 대표의 부친은 현업에서 한발 물러나기는 했지만 부자가 방짜징과 방짜유기로 나란히 무형문화재 보유자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남한식과 북한식은 제작과정에서는 큰 차이가 없지만 남한식은 6명이 한조를 이뤄 작업하는데 반해 북한식은 무려 11명이 한조로 제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그는 “소리를 불어 넣고 뭉친 소리는 풀어주고, 흩어진 소리는 모아 주는 것이 악기의 생명이라며 방짜기술의 최고봉”이라고 말했다. 최소 5000에서 6000번의 메질(망치질)을 해야 징 하나가 완성된단다.장정 6명이 사흘일해야 징 두개장정 여섯명이 꼬박 사흘을 일해야 고작 징 두 개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많은 노력과 정성이 들어야 악기 하나가 완성되는 고단한 작업이다.
징의 주재료는 구리와 주석의 비율이 78:22인 합금이다. 이렇게 배합된 합금으로 만들어진 ‘바둑(일명 바데기)’을 불에 달궈 가며 망치로 두드려 그릇이나 악기를 만든다.
방짜유기나 악기를 만드는 과정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소리를 불어 넣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이 대표는 “징과 꽹과리 등 악기의 생명은 소리”라며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가운데 부분은 두껍게하고 주변으로 갈수록 얇아졌다가 다시 입구로 올라오면서 두꺼워져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했다. 수작업으로 일정한 두께를 만들어 원하는 소리를 얻기 위해서는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것이 ‘벼름질’ 과정이다.소중한 우리 것 기술전수는 사명유기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크게 여덟가지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가 주원료인 구리와 주석을 일정 비율로 섞어 ‘용해’하는 과정이다. 다음이 용해해서 만든 ‘바둑’을 기본형태로 얇게 펴는 ‘네핌질’ 과정이 이어진다. 그리고 재료를 두 장이나 여러장 겹쳐 ‘우김질’하고 U자 형태로 겹쳐진 재료를 하나씩 분리하는 ‘냄질’을 한다. 그다음은 여러명의 닥침꾼들이 달궈진 우개리(재료)를 망치로 동시에 내리치면서 서로 자신의 쪽으로 당겨 늘리면서 모양을 잡아가는 ‘닥침질’이다. 높이를 일정하게 맞추는 협도질과 제질 및 단금질, 벼름질, 가질 등의 작업과정을 거쳐야 하나의 제품으로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수십번 놋쇠를 달구고 수천번의 메질을 가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산화한 피막을 벗겨내는 마지막 가질 작업이 끝나면 마침내 찬란한 금빛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 유기다.
이점식 대표는 “방짜유기의 고수는 징이다. 세숫대야에 혼을 불어넣으면 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징에 생명을 불어넣어 소리를 잡는 작업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면서 “예부터 징을 만드는 사람은 양푼이나 세숫대야를 만들 수 있지만 양푼이나 세숫대야를 만드는 사람은 징을 만들 수 없다며 오랜기간 숙련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힘들고 기술습득기간이 길다는 이유로 우리 고유의 것을 요즘 젊은이들이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다”며 소중한 우리 전통의 맥을 잇기 위한 사명감으로 두 아들에게 기능습득을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 방짜유기 제작과정 시연회 기대해병대를 전역한 두 아들은 모두 대학 복학을 포기한 채 아버지의 방짜기능 전수를 위해 함박눈이 내리는 이 겨울에도 꽃뿌리 함양징터 기념비 앞 전수교육장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이 대표는 “오는 3월께 이곳에서 함양방짜유기 개장식에 맞춰 전통방식 방짜유기 제작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한 시연회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면서 많은 분들의 관심과 체험을 당부했다.이점식 대표는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은 데 그치지 않고 기술교육을 위한 전문 전수관과 체험관을 확충하고 방짜제품 전시관도 마련해 꽃뿌리 함양징터의 명성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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