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런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현직에 있을 때 데이비드 버킹엄의 「미디어 교육」을 교내 연수자료로 택했다가 후회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는 사람들은 소수이고, 가르치는 일에 대해 교과서적 사고방식을 뛰어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곳이 교직이기 때문이다. 관심도 없는 ‘미디어교육’에 대한 연수가 그들에게는 공허하고 지루했을 것이다. 2010년 길버트 하이트의 「가르침의 예술」에 깊이 공감하며 곳곳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면서도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없었다. 「미디어 교육」이 그러했듯이 이 책에도 흥미를 보이는 동료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서가에서 「가르침의 예술」을 펴보면서 ‘쓸데없는 열정이었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르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교육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아래의 글을 읽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초·중등학교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들은 보통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보통 사람들보다 세상을 더 잘 알아야 하고, 더 폭넓은 관심사를 가져야 하고, 인간의 문제에 대해 더 적극적인 열정을 품어야 하고, 끊임없이 예술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줄 알아야 하고, 삶의 소소한 즐거움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감각을 지녀야 하고, 생애 전체를 영혼의 지평을 넓히는 데 쓸 줄 알아야 한다.” 길버트 하이트의 이 글을 교사들이 마음에 두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교사는 음악의 여러 장르에 대해 알아야 하고, 미술작품에 대해 알아야 하며 과학과 문학과 수학과 사회의 전 영역에 대해 고르게 알아야 제대로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음악과 미술과 정치와 문화와 사회를 포괄적으로 녹여낸 것이며, 음악없는 무용은 없고, 예술적 감각과 수학과 공학없이 건축을 할 수 없으며 철학없이 인간사회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모든 것은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다.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교사가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고려시대의 문화를 가르치면서 “고려청자를 만들었고 팔만대장경과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식의 단순한 전달을 수업이라고 하기 어렵다. 고려문화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역사와 예술과 정신과 시대를 내면화 하도록 하는 것이 수업의 목적이다. “그는 이윽고 나에게 에세이에 관해서 쪽마다. 문단마다, 심지어 단어마다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첫 쪽에서 연합국에 대해서 그렇게 기술한 근거가 뭐냐? 그것을 좀 더 잘 분석해 볼 가치는 없는가? 그것을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없는가? 다른 해석을 내 놓은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는가? 최근의 발견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았을까? 인용한 대목의 정확한 출처는 어디인가?”길버트 하이트가 대학시절 하니쉬 교수에게 에세이에 대한 지도를 받을 때의 기록 중 일부이다. 이런 지도가 대학에서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학생들은 사회의 문제에 어른들보다 훨씬 논리적으로 접근하며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지곡초등학교에서 논술지도를 할 때 ‘산타클로스의 존재 유무를 밝히고 그 근거를 제시하라’는 문제에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한 후 ‘아이들의 꿈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학생이 있었다. 초등학생들의 사고가 ‘초딩’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논증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스키마가 중요하다. 정보를 통합하고 조직하는 능력이 없으면 글을 쓰기 어렵다. 교사는 문사철을 표방하는 인문학 뿐만 아니라 사회의 제반 문제에 대해, 문화에 대해 알아야 하고 질문으로 주제에 근접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길버트 하이트가 가르침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강조한 이유를 이 책을 읽으면 공감하게 된다. 모노클 편집장 타일러 브륄레의 “you are what you read’는 의미심장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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