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소 술을 잘 안 마신다. 원래 술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술을 마시면 취하기 때문에 잘 안 마신다.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하는 거, 이게 내 약점이다. 수년 전에 친구가 놀러오면서 비싼 양주를 한 병 선물로 가져온 적이 있는데, 몇 년간 주방 진열장 구석에서 잠자다가 결국 내 입에 들어가기는 했다. 그리고 재작년에 또 멋진 친구가 놀러 와서 좋은 고량주 한 병을 주고 갔는데 그건 오늘까지 개봉이 안 된 채로 벽난로 위에 장식돼있었다.
오늘 그 고량주를 개봉했다. 나는 술에 대해 경지는 없지만 일단 이 술은 향긋하다. 아내 말에 의하면 나는 평소에는 술을 거의 안 마시는데, 곶감 작업하며 힘들어 할 때는 안마시던 술을 갑자기 마신다고 한다. 근데 내가 마시는 술이라고 해봐야 기껏 한 잔이다. 기분에 따라 두 잔도 되고 세 잔도 되지만 내 주량은 뻔해서 쐐주 반병 마시면 끝이다. 더 마시면 꼭 바보같은 일이 생기기 때문에 더는 안 마신다. 바보같은 일이란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평평한 거실 바닥이 경사가 져 보여 미끄럼을 탄다던지, 데크 기둥 하나를 두 개라고 우기며 그 사이로 빠져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거리다.
내가 곶감 작업할 때 안마시던 술이 땡기는 건 아내 말대로 일이 힘들어서 일거다. 술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고 싶어서 일거다. 과연 아무 거도 아닌 것 같았던 고량주 한 잔이 목구멍을 넘어가 내장탕을 따끈하게 데워주니 내가 이 좋은 것에 그간 왜 그리 무심했나 싶을 정도로 반성이 된다. 앞으로는 술을 좀 더 가까이 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해본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니 내 얼굴이 곶감처럼 빨갛게 숙성이 되어있다.
사실 내가 십 수 년 전 귀농해서 이런 저런 돈 안 되는 농사로 고생하다가 그나마 밥은 먹여주는 곶감농사를 하게 된 데는 이 술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내가 귀농하고 몇 년간 하는 일마다 돈은 안 되고 헛힘만 쓰고 있을 때 이웃마을 영감님이 곶감을 한번 만들어 보라고 권했다. 그 때만 해도 내가 사는 마을에 감나무는 많았지만 모두 고목이라 감을 따려면 목숨 걸고 나무를 타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감나무 가지는 워낙 약해서 잘 부러지기 때문에 생업으로 감을 따는 건 참말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된 데는 영감님의 한마디 때문이다.
“곶감 깎으면 술도 한잔쓱 할 수 있지~” 영감님은 턱을 쓰윽 내밀며 진지하게 이야기 하셨다. 돈 안 되는 쌀농사, 밭농사 그만 두고 곶감을 만들면 우리 네 식구 밥은 물론이고 내 술값도 나온다는 말이다. 그 당시 귀농 몇 년 만에 거들이 난 나에게는 참으로 거룩한 약속이었고 메시지였다. 그 영감님 꼬임에 넘어가 곶감농사를 한지 어언 십년이 넘었다. 영감님은 연로하셔서 곶감 농사를 접은 지 수년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매년 곶감농사 잘 짓겠다고 시설투자를 하고 있다. 그 영감님은 시집간 딸이 여덟이라 판로 걱정없이 곶감 농사로 술도 한잔쓱 할 수 있었지만, 나는 곶감 판매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총각 아들만 둘이라 오늘도 곶감 판매를 어떻게 해야 술도 한잔쓱 하게 될까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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