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의 표지에 ‘올해의 인물’이 게재되었다. 각 언론사는 “올해의 인물은 미투Me T00의 캠페인에 동참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침묵을 깬 자들Silence Breakers’로 선정했으며 트럼프와 시진핑을 제쳤다”고 앞다투어 보도했다. ‘미투’와 ‘해시태그’는 이제 사회에서 부적절한 일을 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암호로 읽힌다. 부적절한 일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 가해자의 권력에 굴복하여 피하거나 숨지 않는다는 것(미투), 이를 수많은 사람들이 특정 핵심어로 검색(해시태그)하고 확산함으로서 그들에 대항하는 또 다른 힘을 결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의 광범위한 공유는 세계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와인스틴 스캔들’과 비슷한 일이 영화판에서 일어났지만 미투 캠페인은 없었다. ‘여혐’이 공개적으로 도마에 올랐고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는 듯 <82년생 김지영>이나 인스타그램의 <며느라기>가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82년생 김지영>은 예스 24의 ‘올해의 책’ 24권 중 1위로 선정되어 그 반향이 어느 정도인가를 실감하게 했다.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 만연한 시대상을 수많은 독자들이 읽었다는 것은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 2017년 10월 22일자의 <며느라기>에는 ‘좋아요’ 34,497개, 댓글 5,588개가 달렸다. 유명인도 아닌 인스타그램의 소소한 웹툰에 열광하는 이유는 일반사회에서 당연한 듯이 일어나는 가부장적 여성차별에 대한 공감 때문이다. 이 웹툰에는 특별히 나쁜사람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누구의 집에서나 일어나는 일상의 모습이며 우리가 늘 접하는 일들이다. 그런데 그 일상을 웹툰을 통해 객관적으로 들여다 봄으로써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실체와 ‘차별’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댓글로 공감하고 분노하며 이를 해시태그로 다시 확산시키는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이나 <며느라기>가 없었다면 불합리한 차별이 차별인 줄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이를 본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댓글로 공감하고 해시태그로 공유를 확산하여 문제로 부각된 것이다. 미국여배우 애슐리 저드가 뉴욕 타임즈에 1997년 거물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에게 당한 피해를 증언하지 않았다면 기네스 펠트로, 앤젤리나 졸리 등 유명 여배우의 잇따른 미투도, 미투 캠페인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타임의 표지도 다른 인물로 장식되었을 것이다. 미투 해시태그는 무력한 개인의 말에는 실리지 않는 무게와 반응을 다수의 힘으로 해결하는 첨단의 수단이 될수 있었다. 한 사람이 외칠 땐 묵살되었던 일들이 언론에 공개되자 미투 캠페인으로 공론화의 장이 된 것이다.
한편 소셜미디어로 접하는 모든 정보와 그에 대한 댓글이 반드시 옳은 것 만은 아니라는 문제도 공존한다. 240번 버스기사의 무고한 사례가 그렇다. 정황의 판단이나 진실에 대한 신중한 접근없이 분별을 잃은 대응은 왜곡과 전도가 불가피하고 무고한 피해자를 만든다는 것을 각인 시킨 사건이다. 감정적으로 우우 몰려 삿대질하기보다 차분하고 진실에 근거한 이성적인 대처가 무고한 희생을 막을 수 있다.
제야가 가까워졌고 새해도 눈앞으로 다가왔다. 찰스 램은 자신은 ‘천성이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소심하다’고 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는 손을 반겨 맞고 가는 손을 재촉해’ 보낸다. 잊어버리고 싶은 과거는 지워지지 않지만 이를 초석으로 삼아 건강한 정신으로 좀더 성숙한 사회가 되어 해서는 안되는 짓은 하지않기를 바란다. ‘완장’을 차고 거들먹거리며 약자 앞에 군림하려드는 저속한 행태는 더 이상 보고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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