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나무를 불에 달궈 진액을 채취하는 화칠(火漆). 번거롭고 고단한 작업에 명맥이 끊길 지경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전통방식을 고수하며 지리산 자락에서 2대째 묵묵히 화칠을 생산하는 이가 있다.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 안재호(57)씨다. “화칠은 약이다”라고 말하는 안씨는 25년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의 나이 서른두살 때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화칠생산 가업을 물려받아 2대에 걸쳐 55년째 화칠을 생산하고 있다. 당시 부친과 함께 일하던 동료 어르신들이 여전히 안씨를 돕고 있다. 화칠 채취는 3가지 공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3명이 한조를 이뤄야 작업을 할 수 있다. 첫 공정인 옻나무에 일정한 간격으로 홈을 파는 일은 가장 연세가 많은 오수봉(87) 어르신이 맡고 있다. 안씨의 아버지와 같이 일을 시작한 55년 경력의 소유자다. 다음 공정인 장작불을 피워 진액을 뽑아내는 작업은 동윤호(80) 어르신의 몫이다. 30년 경력의 베테랑이지만 이 일은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 빠른 손놀림이 필요한 마지막 공정은 안재호씨가 담당한다. 애써 뽑아낸 화칠 진액을 한 방울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달궈진 옻나무를 이리저리 돌리며 칼집 난 옻나무 홈을 대나무 통으로 훑는 일이다. 화칠을 생산하는 날이면 새벽 4시부터 작업이 시작된다. 장작불을 지피고 미리 베 놓은 옻나무를 작업장으로 옮기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된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무거운 옻나무와 씨름하며 하루 12시간 이상 사투를 벌인다. 사흘일하면 이틀을 쉬어야 할 만큼 고단한 작업이다. 하루 종일 3명이서 채취하는 화칠은 고작 1㎏에 불과하단다. 그래도 워낙 고가여서 농한기 수입으로는 제법 짭짤하다. 370g 한통에 27만원을 호가한다. 화칠은 위장병에 특효인 것으로 알려져 찾는 사람들이 많다. 복용한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전국에서 안씨의 집까지 직접 찾아오기도 한다. 한때는 이 일대만해도 화칠을 생산하는 농가들이 제법 많았다고 한다. 지리산 천왕봉을 비롯해 해발 1000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이곳은 예부터 질 좋은 참옻나무 자생지였다. 그러나 전통방식 외에는 달리 생산방법이 없는 화칠은 금계마을 안재호씨와 강원도 원주 등 2개 농가에서만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화칠은 낙엽이 떨어지는 늦가을부터 이듬해 2월까지 3개월만 생산 가능하다. 농한기를 이용해 부업하기 좋은 작목이지만 안씨는 화칠 생산이 주업이다, 화칠뿐만 아니라 봄에는 옻순을 채취하고 여름에는 생옻 진액을 채취한다. 최고령인 오수봉 어르신은 “화칠은 말할 것도 없고 쌉싸름한 옻순은 지리산 흑돼지 삼겹살과 먹으면 궁합이 끝내주지, 나무와 껍질은 닭과 오리백숙에 넣고 한약제로도 사용하고, 생옻은 생옻대로”라며 “하나도 버릴게 없는 게 옻나무다”고 자랑했다. 불에 달궈 화칠을 뽑아낸 옻나무도 음료수 공장으로 팔려가 활용된다고 했다. 정말 버릴게 없다. 화칠을 생산하는 옻나무는 10년생 이상만 사용한다. 10년이 넘어야 약성도 강하고 어느 정도 진액도 채취할 수 있다고 했다. 10년이 되기 전까지는 나무 밑동을 베지 않고 생옻을 채취해 목기나 나무가구 등을 칠하는 천연도료로 판매한다. 안씨는 “일은 힘들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업이고 화칠을 찾는 분들이 꾸준히 있어 여건이 주어지는 한 전통방식의 화칠 생산을 고수 하겠다”며 자신만이라도 명맥을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한겨울이 찾아오는 이맘때면 최상품 화칠을 생산하기 위한 장작불 연기가 이곳 지리산 자락에서 해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기를 기대해 본다.정세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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