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굴러가는 소리만 들어도 알지”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어깨너머 배운 기술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신의 자전거방을 열었다. 함양에서 자전거 밥 먹고 산지가 벌써 58년이다. 함양읍 교산리에서 자전거 수리와 판매를 하는 알톤스포츠 장재명(74) 대표의 이야기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16살이던 1959년에 삼일탕 앞에서 자전거 수리점을 개업했다. 이곳 교산리로 이전한 것은 15년 전이다. 중학생이던 장씨는 하약국 앞에서 친구 아버지가 하던 자전거방에서 어깨너머로 자전거 수리 기술을 배웠다. 체계적인 기술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손재주와 눈썰미가 있어서 한번 보면 무엇이든 따라 할 수 있는 재주를 타고났다. 당시만 해도 자전거가 상당히 귀했던 시절이다. 197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아주 부잣집이 아니면 개인이 소유한 자전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개인이 소유한 자전거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우체국과 경찰서 등 일부 관공서에만 업무용으로 자전거를 지급했던 때다. 어린나이에 개업한 장씨는 자전거 수리로는 밥벌이도 못해 나무리어카(손수레)를 만들어 팔고 리어카 바퀴 수리도 했다고 한다. 그의 손재주가 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은 하나둘 늘어났다. 주요 고객은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배달하던 일명 ‘짐빨이’ 자전거였다. 양조장 자전거는 무거운 막걸리 20리터 들이 말 통을 한번에 8개에서 10개 정도를 실어 날랐다. 당시에는 도로도 비포장인 데다가 주막이나 술판매상 등에 매일 무거운 막걸리를 운반했기 때문에 양조장 자전거는 잦은 고장을 일으켰다. 장씨는 “그때는 술도가(양조장)도 많았고 도가마다 자전거를 몇 대씩 갖고 있었기 때문에 술도가 세군데 정도만 거래처로 확보해도 먹고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그 후 70년대 후반부터 함양읍내 도로와 주요 국도 등이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경제도 급성장하면서 자전거 붐이 일기 시작했다. “80년대 초부터 자전거가 대중화 됐는데 그때는 직원을 다섯명이나 둘 정도로 일도 많았고 돈도 많이 벌었다”면서 자전거를 고치기 위해 한나절씩 기다리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장씨는 “그때 돈을 모았으면 부자가 됐을 건데 친구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다 보니 큰돈은 못 모았다”고 털어놨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고 했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들이나 객지 생활을 하던 친구들이 고향에 오면 장씨 가게에 들렀다가 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고 한다. 장씨 가게와 집은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돈을 잘 벌었으니 술값은 거의 장씨가 도맡아 냈다.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면 지나가던 손님들도 “사장님 한잔하시죠”라고 하면 거절할 줄 모르는 옆집 아저씨였다. 특별히 선약이 없는 날은 단골들과 술판을 벌이곤 했다. 술은 즐겼으나 그렇다고 폭음을 하지는 않았다. 일흔이 넘은 그가 지금까지 건강을 관리하면서 자전거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는 비결이다. 양조장 술배달 직원들은 배달 중에 자전거가 고장 나 곤란을 겪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자전거를 수리해 술배달을 마치고 양조장에 돌아가면 꾀부리며 늦게 다닌다고 잘리던(해고) 시절이었다. “당시는 ‘내일부터 나오지 마.’ 이 한마디면 끝이었던 시절이었다”며 이 같은 사정을 아는 장씨는 자전거를 수리하고 나면 양조장 서기에게 연락해 자전거 고장으로 배달원이 좀 늦게 들어갈 거라고 일일이 연락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1990년대 오토바이가 대중화되면서 자전거의 인기는 시들해졌고 오랜 불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장씨는 예전만 못하지만 꾸준히 밥벌이 정도는 했다고 한다. 2남1녀인 세 자녀 다 대학공부까지 시켰다. 장재명씨는 “자식들 모두 결혼해서 제 밥벌이하면서 살고 있다”며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취미 삼아 손주들 과잣값 버는 재미로 일을 계속 하겠다”며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정세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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