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절정일 때 엄천골 농부들의 곶감 작업은 시작된다. 하필 단풍이 절정인 이 시기에 곶감을 깎느라 고생하니 유감스럽기도 하지만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마음은 급해진다. 상강 이후 무서리 내리고 이어 된서리, 장독 뚜껑 고인 물에 살얼음이 얼 무렵 곶감 깎는 사람들은 아이구 어깨야~ 하며 무거운 감 박스를 들어 나른다. 아이구 허리야~ 하며 감 껍질을 벗기는 일에 집중한다. 그리고 덕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보고 아이구야~ 저 많은 감을 내가 다 깎았네~ 하며 뿌듯해 한다. 그나저나 올 겨울은 날씨가 겨울답게 추워야 할 텐데 온난화다 뭐시다 해서 비가 잦으면 안 되는데 하며 어쨌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자기암시를 한다.
“올해는 얼마나 깎을겨?” “난 쬐금만 할거야~” “쬐끔? 얼마나 쬐끔 할 건데?” “한 닷 동?” 엄천골 농부들은 이웃집에서 올해 곶감을 얼마나 깎는 지 관심이 많다. 근데 닷 동이면 결코 쬐끔이 아니다. 한 동이 감 백접, 한 접은 감 백개니 다섯 동이면 감이 자그마치 오만 개다. 덕장에 감 오만 개를 깎아 걸려면 다리에 오토바이 엔진이라도 달아야 할 지경이다. 나도 올해는 감을 쬐끔만 깎는데 다리에 오토바이 엔진을 두 개 달았다.
감을 깎아 덕장에 매다는데 웃음이 막 나왔다. 감을 행거에 줄줄이 꿰어 매다는 일은 집중력과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일로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마침 건장한 두 아들이 집에 와 있어 나는 아들의 도움을 받아 감을 매달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혼자 하면서도 힘든지 모르겠다. 감을 쉽게 매달 수 있는 신형 행거가 나온 것이다. 작업을 해보니 이렇게 쉬울 수가 없다. 대부분의 곶감 농가에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행거는 감꼭지를 꿴 집개의 모가지를 날개사이로 끼우게 되어있다. 이것은 바늘에 실 꿰듯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라 한손으로 행거 날개를 거머쥐고 다른 한손으로 감을 꿴 집개 모가지를 날개 틈으로 밀어 넣는데 헛손질하기 예사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나온 신형은 집개를 행거의 턱에 그냥 걸치기만 하면 되고, 양 손으로 감을 동시에 걸 수가 있다. 참으로 단순한 디자인이다. 세 살 네 살배기 어린 아이들이나 생각해 낼 수 있는 이렇게 단순한 디자인이 왜 이제야 나왔을까 싶다. 야홋~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고 있는데, 자동박피기로 감을 깎는 문정 아지매와 뒷손질하며 감꼭지에 집개를 꿰는 작업을 하던 절터 아지매가 소리죽여 킥킥거리고 있다. 무슨 일인가 혹시 내 흉이라도 보고 있는 건가 싶어 다가가보니 참말로 낯 뜨겁게 생긴 감을 보고 낄낄거리다 넘어간다. 아무리 암꽃과 수꽃이 어울려 생긴 감이라지만 그 기억을 우째 저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준단 말인가.
감이 덕장에 걸리면 지리 상봉에서 얼음으로 만든 화살 바람이 내려온다. 높은 봉우리에서 사스레나무, 당단풍, 가문비나무, 함박나무 이파리를 떨구고 이 골짝 저 골짜기를 스쳐온 바람은 산자락의 은행과 벚나무 단풍을 어루만지고 곶감 덕장에 머문다. 그러면 옷 벗은 감이 덕장에 매달린 채 흔들리며 노란 은행단풍이 들었다가 붉은 벚단풍이 든다. 이렇게 단풍이 든 감은 단단했던 자아를 놓아버리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맛의 정진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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