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감 깎을 철이 되어 며칠째 덕장에서 바삐 움직인다. 새봄맞이 대청소라도 하듯 살짝 들뜬 기분이 되어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지나간 시간의 찌꺼기를 씻어낸다. 감을 덕장에 주렁주렁 매달아줄 행거와 채반을 소독하고 칼도 잘 벼린다. 비록 손바닥 크기의 작은 과도지만 곶감쟁이의 청룡언월도다. 해마다 곶감 작업을 도와주시는 절터 아지매는 우리 집 감 박스를 보고 “성격 나온다~”며 놀린다. 감을 담는 노란 플라스틱 상자가 항상 새것처럼 깨끗하다고 내가 마치 결벽증이라도 있는 냥 놀려대는 것이다. 한 때 나는 곶감 시즌이 끝나는 봄에 이 감 박스를 엄천강 수로에 한나절 담궜다가 수세미로 박박 문지르곤 했다. 버들가지 눈 뜨는 봄날에 강가에서 빨래하듯 하던 이 작업을 이제는 집에서 힘 안들이고 한다. 왕 특대 고무 다라이에 물과 락스를 넣고 감 박스를 한 다스씩 반나절만 담궈 놓으면 새것처럼 깨끗해진다. 호스로 한번 헹구기만 하면 되니 손바닥에 물집 잡힐 일은 이제 없다.덕장 바닥까지 광이 나도록 닦아내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감 박피기를 정비한다. 한나절에 수 천 개의 감을 깎아 주는 고마운 자동박피기는 아예 종합 검진을 한다.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을 정도로(진짜 결벽증?) 나사 하나하나 다 분해해서 닦고 조이고 술을 먹인다. 보통 기계는 잘 돌아가라고 윤활유를 먹이지만 식품 기계라 기름 대신 쐐주를 먹인다. 자동박피기가 종합검진 결과 이상 소견 없이 모든 항목에서 정상 A(건강양호)로 판정되도록 세심하게 여기저기 손질한다.곶감용 감을 수확하는데 올해는 아들 둘이 소매를 걷어 붙이고 도와주니 정작 나는 힘쓸 일이 없다. 흐뭇한 마음에 아들 자랑이 하고 싶어 잘 생긴 얼굴을 찍어 SNS에 올리려고 하는데 초상권 침해라고 못하게 한다. 무슨 소리야~내가 저작권잔데... 하고 큰소리 쳐놓고는 몰래 몰래 찍는다. 감 홍시에 달려든 말벌을 찍는 척하며 무거운 감 박스를 끄덕 끄덕 들어 올리는 큰 아들을 찍는다. 감나무 밭에 흐드러진 산국을 찍는 척하며 홍시를 먹으며 환하게 웃는 작은 아들 얼굴에 초점을 맞춘다. 건장한 아들이 둘이나 도와주니 올해는 곶감을 좀 더 많이 깎아 볼까 하는 욕심이 슬그머니 생긴다. 올해 곶감을 두 배로 깎아도 아들이 도와주니 힘은 별로 안들 것이고 그 곶감을 다 팔고나면 나는 분명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그나저나 단풍이 절정이다. 감나무 이파리도 울긋불긋 지리산 골짜기엔 색색의 활엽수들로 눈부시다. 유감스럽게 단풍은 내가 제일 바쁠 때 절정이다. 나도 단풍드는 나이가 되니 이 맘 때 산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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