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 서울살이, 우리는 함양사람입니다 ⑤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아련한 추억에 빠져든다. 향우들은 고향 함양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그립고 애틋하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고향 함양에서의 삶 보다는 타지의 삶이 대부분인 향우들은 언제나 고향 함양의 일이 우선이다. 향우회를 만들고 동창회에 참석하고, 같은 고향 함양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진한 형제애를 나눈다. 고향 일이라면 한달음에 달려와 고향과 지역 발전을 위해 힘쓴다.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에서 함양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재경 향우들. 고향 함양을 그리며 살아가는 재경향우회와 각 읍면 향우회를 통해 팍팍했던 서울살이와 현재의 삶, 그리고 향우 등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편집자주> 교단에서 베푼 ‘선비정신’ 그 뿌리는 함양이다 최인석 전 병곡면향우회장 40년에 달하는 세월을 교직에 몸담은 최인석 전 재경병곡면향우회장은 “다시 태어나도 교사가 되겠다”고 한다. 현직을 떠난 지 20여 년이 다되어 가는데도 교단에서 쌓은 국가관과 교육관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겸손을 제일 미덕으로 평생 살아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고향일 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최인석 회장을 서울 목동 자택에서 만났다. 최 회장은 아파트 현관문을 활짝 열어두고 본지 취재팀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넥타이는 하지 않았지만 하얀 와이셔츠에 양복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고 계셨다. 평소에도 흐트러짐이 없는 그는 ‘겸손을 제일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최 회장은 ‘겸손은 만사의 미덕이다’라는 좌우명으로 평생을 살고 있다고 한다. 향우들은 물론 주위에서 그가 늘 존경받는 이유인 듯하다.“이제 나이 들어 고향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면서 “고향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는 후배 향우들을 신문에 소개해 달라”고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멀리 고향에서 이렇게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고 미안하다”고 한다. “재경 향우회 원로로서 향우들에게 그동안 살아오신 이야기나 당부하고 싶은 말씀 한번 들려주시라”는 취재진의 부탁에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최 회장은 여든다섯의 나이에도 등산을 즐기는 등 건강관리도 철저하다. 목소리도 오륙십대 못지않게 카랑카랑하다. 치아는 의치나 보철이 하나도 없다. 치과의사인 사위가 놀랄 정도로 튼튼하다고 한다. 눈도 치아도 모두 부모님이 물려주신 그대로라고 한다.최인석 회장은 함양군 병곡면 송평마을이 고향이다. 병곡초등학교를 졸업(제11회)한 최 회장은 어려운 가정형편과 아버지의 반대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과 공부를 곧잘 했던 최 회장은 중학교 진학 대신 가구공장에서 기능공으로 일했다. 하지만 중학교 진학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낮에는 가구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홀로 공부했다고 한다. 2년뒤 함양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해 중학교 3년 과정을 수료했다. 정규교육과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 입학자격을 취득했다. 중학교 진학 포기 가구공장 취업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배워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 시키겠다”는 어머니의 강한 의지와 권유로 진주 동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기계체조와 축구, 달리기 등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에다 학업성적도 우수해 동명고 2~3학년 2년 동안 연거푸 대대장을 맡아 학생들을 통솔했다. 여태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유지하는 것도 그때 대대장을 한 덕이 아닌가 싶다고 한다. 최 회장은 초등학교 5학년 때 100m를 13초에 주파할 정도로 날렵했단다. 축구 실력도 수준급이라고 한다.최 회장은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선비의 고장에서 태어났다는 자부심도 대단하다. 그는 교직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상에서도 선비정신을 생활화하고 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고향을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고향을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며 늘 후배 향우들에게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할 것을 주문한다. 최 회장의 흐트러짐 없는 자기관리는 향우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로부터 늘 존경의 대상이다.최인석 회장은 남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맡은 일에 대해선 한치의 소홀함이 없다. 과묵한 성격인 최 회장은 학창시절에는 ‘가시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부처님‘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말수도 적었다고 한다.이런 최 회장은 고향 사랑도 은근하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향우회 행사라면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참석한다. 때로는 기념품도 준비해 선물한다.병곡면향우회장을 지낸 최 회장은 1999년 창립한 재경 함양군산악회 설립 주역이다. 초대부터 3대까지 회장을 맡아 산악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타향살이에 고달픈 향우들의 화합과 침목을 다지는 역할을 똑똑히 했다. 이는 각 읍·면 산악회를 결성하는 촉매제가 되었고 재경향우회 활성화에 큰 버팀목으로 작용했다.재경 함양군산악회 창립 주역몇해전에는 고향 송평마을회관 건립자금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기금 500만원을 선뜻 내놓기도 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는 고향 어르신들을 위한 경로잔치도 자주 열었다고 한다. 선물로 준비한 은수저를 받아 들고 기뻐하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평생을 교직에 몸담은 그는 교직생활에서도 배려와 베풂, 올곧음 등 고향의 선비정신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았다.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최 회장은 서울 동명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장선생으로 정년퇴임을 하기까지 38년 동안 교단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는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38년 ‘외곬 인생’ 후회는 없다최 회장은 초임교사 때부터 담임을 맡았다. 당시에는 제때 수업료인 월사금을 못내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최 회장은 박봉인 월급을 쪼개 반 학생들의 월사금을 대납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한 학생의 경우 1년 넘게 수업료를 내준 경우도 있는데 그 학생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공부도 곧잘 잘하고 착한 학생이었는데 어느 날 자퇴서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연유를 듣고 가정방문을 해보니 아버지의 사업부도로 어머니가 노점상을 하며 식구들의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언니는 이미 다니던 학교를 자퇴한 상태였다고 한다. 최 회장은 “수업료 걱정은 하지 말고 계속 학교에 다니라”며 1년 동안 수업료를 대신 내주었다고 한다. 그 학생의 가정형편이 나아져 스스로 수업료를 낼 수 있을 때까지 꼬박 1년 동안 수업료를 대신 내준 것이다. 자신이 중학 진학을 포기했던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에 “배우고자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게 당시 내 생각 이었다”고 회고했다. 자식은 사랑과 칭찬으로 키워라최 회장은 “교육의 근본은 인성교육에서 시작돼야 한다”며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날이 갈수록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변질돼 큰일이다”며 여전히 우리 교육을 걱정한다. 최 회장은 “지식은 언제든지 쌓을 수 있지만 인성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초등교육과 밥상머리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평생을 교단에서 후학을 양성해온 최 회장은 소위 말하는 ‘자식 농사’도 잘 지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는데 모두 서울 명문대를 졸업하고 큰아들은 성형외과 의사로, 막내인 작은 아들은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MBC에 근무하다 치과의사인 사위와 결혼한 뒤 가사를 전담하고 있다. 자식을 잘 키우는 비결을 묻자 최 회장은 “아이들은 사랑과 칭찬을 먹고 자란다”며 “많이 사랑해주고 칭찬해 주라”고 조언했다.“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소년범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며 사회적 약자와 미래세대에게 손길을 내밀고 있는 최인석 회장의 열정은 아직도 여전하다. 최인석 회장이 걸어온 길 ◇ 출생지 : 함양군 병곡면 송평마을◇ 학 력 병곡초등학교 졸업(1947년/제11회) 함양고등공민학교 수료(1952년/중학교 3년 과정) 진주 동명고등학교 졸업(1955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1959년)◇ 주요 경력 서울 동명여자고등학교 교사 부임(1960년) 서울 동명여자중학교 교감(1990년~1994년) 서울 동명여자중학교 교장(1994년~1998년) 재경 함양군산악회장(초대~3대) 역임 재경 병곡면향우회장(제2대) 역임◇ 주요 수상 교육부 장관상(1987년) 서울시 교원단체연합회장상(1993년) 대한교육단체연합회장상(1997년) 한국청소년연맹 총재상(1998년) 대한 적십자사 총재상(1998년) 국민훈장 석류장(1998년) 최경인 대표이사·정세윤 기자·최원석 서울지사장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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