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산 뒷산 모두 나의 정원이다. 하고 싶은 것 하며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대기업 간부 출신 귀향인 또는 귀농인, 귀촌인(?). 무엇이라고 불러도 어느 하나 썩 어울리지 않는 초보 농사꾼 김병철(52) 씨에게 붙여진 수식어들이다. 김 씨는 함양군 서하면 운곡마을 뒷산 중턱에 터 잡은 다볕농원 대표다. 비닐하우스 3동과 농막, 자투리 공간의 텃밭이 다볕농원의 전부다. 모두 합쳐야 1000평(3600㎡) 남짓한 농장이다. 김 대표는 “여기가 나의 놀이터”라고 농장을 소개했다. 이 곳 생활이 너무 재미지고 행복하단다.
서상면 추상마을이 고향인 김 대표는 3살 때 아버지를 따라 상경했다. 너무 어린 시절이라 고향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은 없다. 태어난 고향이라고 해도 타향이나 다름 아니다. 그래서 귀향인이라고 불리는 것도 어색하다고 한다.
초보 농사꾼인 김병철 대표는 올해 처음으로 자신의 농장에서 딸기 모종을 재배해 중부권 딸기 재배농가에 보급했다. 350평 짜리 비닐하우스 두동에서 10만포기를 생산했다고 한다. 농사경험이 많은 마을 어르신들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튼실한 모종을 키울 수 있었다고 했다. 넉넉한 고향 인심에 주위에는 온통 행복에너지가 넘쳐난다고 한다. “수입으로 따지면 대기업 간부였던 때보다 훨씬 못하지만 행복지수는 몇 배나 높다”며 “이 곳 생활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김 대표의 가장 큰 우군은 ‘을사회’ 친구들이다. 인근 서상면과 서하면에 살고 있는 1965년 을사생들의 모임이다. 회원은 고작 10명이지만 무슨 일이든 먼저 달려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친구들이라고 한다. “오전에 중고 하우스파이프를 가져가라는 연락이 와 혼자 옮길 수가 없어 을사회 친구들에게 SOS를 쳤더니 4명이 달려와 같이 가져왔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김 대표는 이 파이프로 딸기자묘 생산용 하우스를 지을 계획이다.
직장과 사업을 하면서 줄곧 기획과 관리 업무를 해온 김 대표는 의외로 손재주도 탁월하다. 창고겸 기계실로 사용하는 비닐하우스와 조립식 샌드위치패널 농막을 손수 지었다고 한다. 다볕농원이라는 현판과 원목 티테이블, 독서용 책상 등도 모두 손수 제작한 자신의 작품이다. 오전에 갖다 놓은 하우스파이프도 놀이삼아 직접 조립할 생각이란다.
초·중·고·대학을 서울에서 나온 서울내기지만 만능 재주꾼이다. “제복이 너무 멋있어 대학때 학군단에 들어가 ROTC장교로 군생활을 했다”는 그는 의무행정장교로 군복무룰 마친 뒤 대기업 놀이공원에 입사해 18년을 근무했다.
돈 벌 욕심에 직장을 그만두고 40대에 급식사업에 뛰어 들었다. 사업시작 3년만에 하루 2만4000식을 공급할 정도로 사업은 급성장 했다. 직원수도 100명에 달했다. 그러나 1년뒤 급식사업을 접었다. 믿었던 지인이자 회계담당 직원이 수금액을 빼돌렸던 것이다.
급식사업을 정리하고 실의에 빠진 그에게 손을 내민 곳이 있다. 예전에 근무했던 그룹 계열사에서 복직을 제의했다. 그의 능력과 성실함은 정평이 나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직장이 있던 수원으로 이주 했다. 관리부장으로 다시 고액 연봉을 받았다. 4년여만에 빚을 탕감했다. 그리고 행복을 찾아 ‘도시탈출’을 결심했다. 오랜 설득 끝에 아내 이연희(51) 씨의 동의를 받았다. 지난해 5월 아내와 함께 귀향한 뒤 이곳에 자신만의 놀이터를 만들었다. 아내는 전직을 살려 함양군보건소에 근무하고 있다.
김병철 대표는 “늘 꿈꾸던 전원생활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며 “농사일을 포함한 모든 일에 욕심 부리지 않겠다”고 한다. 그가 꿈꾸는 삶은 농장 입구에 활짝 핀 메리골드의 꽃말을 닮았다. 희로애락 중 ‘성냄’을 제외한 모든 의미의 꽃말을 간직한 메리골드. 그중 ‘반듯이 오고야말 행복’이라는 꽃말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인생 2모작을 시작한 그는 50년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베풀고 봉사하는 행복한 삶을 꿈꾸고 있다.정세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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