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 서울살이, 우리는 함양사람입니다④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아련한 추억에 빠져든다. 향우들은 고향 함양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이고 그립고 애틋하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고향 함양에서의 삶 보다는 타지의 삶이 대부분인 향우들은 언제나 고향 함양의 일이 우선이다. 향우회를 만들고 동창회에 참석하고, 같은 고향 함양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진한 형제애를 나눈다. 고향 일이라면 한달음에 달려와 고향과 지역 발전을 위해 힘쓴다.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에서 함양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재경 향우들. 고향 함양을 그리며 살아가는 재경향우회와 각 읍면 향우회를 통해 팍팍했던 서울살이와 현재의 삶, 그리고 향우 등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편집자주>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도 언제나 ‘고속’으로 달린다 백남근 (주)동양고속 대표이사 “지곡 촌놈이 중앙 부처에서 한때 고속승진가도를 달렸죠.” 체신청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해 교통부 수송정책실장(1급 관리관)에 오르기까지 피나는 노력으로 수많은 업적을 남긴 신화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지곡면 시목마을이 고향인 백남근 ㈜동양고속 대표이사가 그 주인공이다.100대1의 경쟁률 뚫고 고교 진학백 대표는 안의초등학교(43회)와 안의중학교(12회)를 졸업한 뒤 누나가 있던 서울로 올라가 국립체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 백낙진 씨와 어머니 김애기 씨 사이에서 1남2녀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전국의 수재들이 다모였던 국립체신고등학교에 1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하게 합격했다. 국비장학생으로 매달 1만2000원의 장학금도 받았다. 당시 서울의 한달 하숙비가 3000원이었다고 하니 1만2000원은 상당히 큰 금액이다. 넉넉지 않은 시골살림에 오히려 보탬을 줬다. 백남근 대표는 “누나 집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생활비는 거의 들지 않았다”며 “장학금 대부분을 부모님께 보내드릴 수 있었다”고 했다.고교 졸업후 체신부에 취업 했다. 세종문화회관 인근에 있던 국제전신전화국에 발령 받았다. 24시간 운영되는 국제전화국은 주야 2교대 근무체계였다. 백 대표는 “야간근무를 할 수 있었던 국제전신전화국에 발령 받은 것은 행운이었다”며 주간에 대학을 다니기 위해 야간근무를 자청했다고 한다. 교통부로 자리를 옮긴 백남근 대표는 초고속승진의 신화를 이어갔다.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한 그는 34살에 서기관(4급)까지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렸다. 부이사관(3급) 승진을 앞두고 제동이 걸렸다.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게 문제였다. 4년을 기다려 8년만에 부이사관으로 승진했다. 다시 고속승진의 날개를 달았다. 부이사관 승진 2년만에 이사관을, 그리고 6년만에 1급 관리관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나이 50살 때다. 초고속 승진의 신화를 이룬 바탕에는 그만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시기와 질투도 만만찮았다. 결국 주위의 시샘이 32년 공직 생활을 내려놓게 했다. 미련 없이 옷을 벗었다. 그의 나이 불과 52살 때다.고속승진 시샘…32년 공직 마감백남근 대표는 ‘불도저’라는 별명처럼 “무슨 일이든 한번 꽂히면 반드시 해내야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그의 긍정적인 생각과 추진력은 국가발전과 고향발전을 위해서도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유치는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함양이 사통팔달의 교통망을 갖추게 된 것도 교통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백 대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백 대표는 “그 정도 능력은 안된다”며 손사래를 친다. 교통부 관광국장 재직시절에는 안의 농월정과 용추사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했고 고속버스터미널 대표로 있으면서 함양~서울간 직통노선을 개설해 접근성을 높였다. 그는 현직을 떠난지 20년이 넘었는데도 교통분야 만큼은 아직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교통부 재직시절 인정받았던 탁월한 업무능력이 그 밑천이다. 준공기업이나 다름없는 서울고속터미널(주) 대표이사도 3번을 연임했다. 현재 몸담고 있는 ㈜동양고속에서도 대표이사를 5번째 연임하고 있다. 장기간 연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서울고속터미널 대표로 와서 보니 지하철 노선이 터미널지하를 관통하는 것으로 설계되어 있었어요. 큰일 났다 싶었죠. 이것은 터미널을 죽이는 겁니다.” 백 대표는 터미널 밖으로 노선을 변경하기 위해 교통부, 국회, 청와대를 수도 없이 찾아다녔다고 한다. 결국 백 대표의 끈질긴 노력과 설득 끝에 지하철노선을 지금의 모습으로 변경 시켰다.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일 거다”며 멋쩍어 했다. 뿐만 아니다. 백 대표는 고속도로 전용차선제 도입과 고속버스화물운송을 합법화한 고속버스화물운송법을 만드는 데도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이전에는 고속버스 화물운송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어 걸핏하면 처벌 받았다고 한다. 시급을 요하는 소화물이나 서류 등을 고속버스를 이용해 저렴한 비용으로 편리하게 보낼 수 있는 것도 그의 작품인 것이다.주위의 모든 사람이 소중한 재산백남근 대표는 오랜 공직생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만난 인연을 허투루 생각하지 않는다. “주위의 모든 분들의 나의 재산이다”고 말하는 백 대표는 그래서 고향에 대한 애정도 남다른지 모른다.재경함양군향우회장을 비롯해 지곡면향우회장, 안의중학교 총동창회장 등을 맡아 서울 향우들을 위해 일했다. 군향우회장 재임 때에는 종로5가에 있던 낡고 오래된 향우회관과 다른 곳에 떨어져 있던 경로회관을 현재의 대방동으로 이전해 향우들의 오랜 숙원을 해결했다. 백 대표는 바쁜 업무에도 짬을 내 향우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향우회관 이전계획을 설명했다. 125명의 향우가 동참해 향우회관 이전에 필요한 기금 2억원을 마련했다. 백 대표는 기부금액이 많고 적음을 떠나 향우회관 이전에 도움을 준 향우들의 이름을 동판에 새겼다. 향우회관 한쪽 벽면에 이 동판을 설치해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11개 읍면향우회는 더욱 활성화 되었고 함양군 전체 향우회도 덩달아 활기를 더했다. 함양군민상은 어느 상보다 값져향우회 운영기금은 물론 고향 후배들을 위해 함양군장학회에 1000만원을 선듯 내놓는가 하면 수시로 고향을 방문해 어르신 위문행사와 이웃돕기를 실천하고 있다. 고향발전과 향우회의 화합을 이끌어낸 그는 지난 2015년 제37회 함양군민상을 수상했다. “홍조근정훈장을 비롯한 대통령 표창 등 많은 상을 받아 봤지만 고향분들의 애정이 담긴 이 상이야말로 어느 상보다 값진 것이다”는 수상 소감에서도 그의 고향사랑은 묻어난다. 백 대표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마라톤을 즐기는 마라톤 마니아다. 그의 건강관리 비법이기도 하다. 지금도 일과를 마치면 매일 10㎞를 달린다고 한다. 보스턴마라톤, 춘천마라톤 등 내로라하는 국내·외 대회에 참가해 정규코스를 30여 차례나 완주 했다. 하프마라톤을 합치면 200여회가 넘는다. 70대가 되기 전까지는 42.195㎞를 3시간대에 주파했다고 한다. “참 대단하시다”고 했더니 “지리산 촌놈이 그 정도는 되어야지”라며 환하게 웃는다. 최경인 대표이사·최원석 서울지사장·정세윤 기자 백남근 대표이사가 걸어온 길 ◇ 출생지 : 함양군 지곡면 시목마을◇ 학 력 안의초등학교 졸업(제43회) 안의중학교 졸업(제12회) 국립체신고등학교 졸업(1962년) 성균관대 경상대학 졸업(1969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2005년)◇ 주요 경력 교통부 총무과장 등(서기관/1978년~1986년) 교통부 공보관(부이사관/1986년) 교통부 안전관리국장(이사관/1988년) 교통부 도시교통국장(1990년) 교통부 관광국장(1991년) 교통부 수송정책실장(관리관/1994년) 한국관광협회 상근 부회장(1995년) 서울고속터미널(주) 대표이사(1998년~2005년) (주)동양고속 부회장(2006년) (주)동양고속 대표이사(2006년~현재)◇ 주요 상훈 건설교통부 교통안전우수업체 표장(1978. 12.) 에너지절약 대통령상 수상(2007. 11.) 경영 및 서비스평가 대통령상 수상(2009. 7.) 경영 및 서비스평가 국무총리상 수상(20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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