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자오(바자우)족은 바다의 집시들이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필리핀의 인근 해안을 떠도는 민족이다. 그들의 삶의 터전은 바다며 배위다. 배위에서 모든 삶을 영위한다. 아이들은 바다가 친구며 놀이터이기도 하다. 바다위의 집시, 낭만이 있어 보이기도 하다. 푸른 바다, 자맥질하는 아이, 배위에서 밥짓는 여인과 피어오르는 연기, 자연친화적인 순수함과 평화로운 정서가 엿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 다바오 시에 있는 바자오 촌은 바자오족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산산조각 내 버린다. 육지에서 가난과 삶의 잔인한 질곡을 짊어지고 바다로 쫓겨난 사람들의 촌락이다. 바닷가에 대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오두막을 지었다. 배가 아닌 수상 가옥인 셈이다. 그 처참한 세월이 50~60년이라 한다. 소문을 듣고 가난에 지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지금은 감당할 수 없는 세력 아닌 세력이 되었다. 가난의 대명사가 되었다.
2017년 10월 12일 바자오 촌을 방문하였다. 육지 길에서 널판지 두어장으로 된 진입로부터가 인상적이다. 흔들리는 아슬아슬한 널판지 길을 조심스럽게 밟고 걸어가야 한다. 아이들은 마치 곡예를 하듯이 걸음마를 배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은 더욱 더 조심해야 한다. 널판지 길 좌우로 집들이 빼곡히 연결되듯이 지어져 있다. 집 안 역시 대나무를 쪼개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서 생활한다.
물이 없는 땅을 보면 기절초풍한 장면이 보인다. 온통 쓰레기로 범벅이 되어 있다. 긴 세월 치우지 않았을 뿐더러 지금도 계속 생활쓰레기를 버리고 또 버린다. 쌓이고 쌓인 쓰레기는 물을 감추고 땅을 감추어 버렸다. 악취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것이 일상이었다. 삶이었다. 아무도 제어하지 않고, 아무도 거리끼지 않는다. 방문하는 관광객만 충격을 받는다. 그런 곳을 관광삼아 방문한다는 것도 관광이라 표현하는 것도 마음 한구석 부담이 된다.
처참한 환경, 최악의 상황인 것 같은데 그들은 그렇지 않은가보다. 한국의 정서로는 이해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난다. 어린 소녀들도 아이를 안고 다니는데 꽃이 피기도 전에 엄마가 되었다. 성적 질서는 존립하지 않으며 근친으로 인한 폐해도 상당하다고 한다.
희망이 있을까? 희망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바자오 촌 사람들은 그곳의 삶에 머물러 있는 듯 하다. 말하자면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필요를 인지하지 않으며,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이 없고, 현 상황에 만족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의 부재일까? 민족성일까? 꿈이 있는데 포기한 것일까? 처음부터 꿈도 꾸지 않은 것인가? 복잡하게 상념들이 교차하고 숙고해보아도 내 스스로는 답을 찾지 못한다.
여기 내가 사는 나라도 가난으로 한숨짓던 시대가 있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가난의 굴레를 자녀들에게 되물림하지 않기 위하여 한 맺힌 삶을 살았다. 교육열은 아무도 말리지 못하였으며, 억척같이 일을 하였다. 그런 어머니 마음도 바자오 촌락의 사람들은 가지지 않는 것일까?
아직도 충격이 가시질 않는다. 혹자는 그곳을 보고 도움을 생각할 것이다. 어떤 이는 그곳을 보고 다른 곳에 사는 것을 감사할지 모른다. 또 어떤 이는 그런 곳이야말로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부산의 어느 교회에서 그 쓰레기를 치우려고 했으나 그들이 원하지 않아 진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다바오 시장 시절 해결해보려 하였으나 역시 시행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할 수 있을까? 답답함이 나를 짓누른다. 절망하고 절망한다. 마치 초창기 바자오 촌락의 사람들처럼.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실 때 얼마나 더러우실까? 얼마나 답답하실까? 마치 우리가 바자오 촌을 보는 것처럼.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없는 역사를 하나님은 이루셨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이 세상보다 더 낮추셨다. 그리고 택한 자를 하늘에 끌어 올리셨다. 죄악의 나라에서 의의나라로 비상하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사랑이다. 오늘도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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