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중 수교 25주년을 맞은 해다. 최근 사드문제와 위안부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한·중·일 동북아 3국의 관계가 다시 냉랭해 지고 있다. 하지만 한·중·일 동북아 3국의 서복(徐福)을 매개로한 역사·문화 교류는 그 어느때 보다 활발하다. 서복은 2200여년전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초를 찾아 동도(東渡)에 나선 인물이다. 그는 비록 전설 속 인물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불로초를 구하러 동도에 오른 게 아니라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한국과 일본에 전파한 평화사절이기도 했다. 주간함양은 ‘불로초, 서복의 꿈을 찾아서’라는 기획을 통해 함양을 비롯한 한국과 중국에 전해 내려오는 서복에 관한 전설과 자료, 각 지자체의 서복 마케팅 등을 재조명해 불로초의 고장 함양의 명성을 더 높이고 웰빙·고령화시대에 맞춰 지역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① 불로초와 서복 그리고 그의 발자취 ② 거제와 남해의 서복 이야기③ 제주도의 서복전설과 전시관④ 중국의 서복 마케팅 1⑤ 중국의 서복 마케팅 2 ⑥ 함양군의 항노화와 서복 마케팅 “서복은 실존인물” 우상화 가속도 2200여년전 우리나라에 불로초를 구하러왔다는 진시황의 방사 서복. 그는 실존 인물인가? 아니면 전설 속 가상 인물인가?라는 의문 속에서 본지 취재팀은 그가 나고 자란 중국 현지를 찾았다. 비록 2박3일이라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서복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와 유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낡고 오랜 세월을 품어 안은 그들의 서복마케팅에서 새로운 희망도 엿봤다.사마천의 사기 중 <진시황본기>에 기록된 서복에 관해 내용은 ‘산둥반도 일대 제나라 사람이며 방사였다’는 사실 이외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서복의 고향은 산둥반도 일대인 제나라 감유현 금산진 혹은 교남현 낭야군으로 압축된다. 그의 출생지나 출항지가 어디건 평화 문화사절로서 그가 동아시아 3국에 끼친 영향만큼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1980년대 초부터 본격 관심 싹터중국 현지에서 서복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불과 30여년전이다. 2200여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비하면 선듯 이해하기 어렵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서복의 기록도 1980년대 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서복의 존재 역시 베일에 가려 있었다. 중국에서조차 진시황의 불로초 이야기는 산둥반도 일대에서 전해지는 전설로만 인식되고 있었다.서복이라는 인물에 대해 중국 현지인들의 본격적인 관심과 연구는 지난 1982년 서주 사범학원 나길상 팀이 인구조사를 벌이던 중 우연히 이 마을 발견하면서 부터다. 서복촌의 발견은 그 동안 전설로 알려지던 서복의 존재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조사에서 감유구가 서복과 관련 깊다는 사실이 최초로 고증(考證)된 것이다. 금산진의 서복유적 발굴은 산둥, 장시, 자개, 용구, 닝보, 상산, 청도, 서주 등 강소성에서 산동성, 절강성에 이르기까지 다른 지역 서복유적 발굴의 불씨를 집혔다. 서북의 고향이 발견 되면서 진시황의 불로초 탐사가 전설이 아닌 역사라는 주장이 제기 됐다. 서복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와 연구도 이때부터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본지 취재팀은 서복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2017년 10월 17일 이른 아침 인천국제공항에서 상해행 첫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시간여 비행 끝에 상해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곧바로 자동차에 올랐다. 서복의 고향 강소성 연운강시 감유구 금산진을 향해 북쪽으로 꼬박 7시간을 달렸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보다 먼 600㎞가 넘었다. 연운강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린 뒤였다.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본격 취재는 다음날 시작됐다.연운강시 역사문화연구담당 진박림(陳博林) 주임(국장급)이 취재팀을 안내했다. 서복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여운강시 시내를 빠져나오니 농로같은 시멘트포장길이 시작됐다. 주변은 여느 시골풍경과 다름없다. 논에는 누렇게 익은 벼와 추수를 끝낸 옥수숫대가 가을걷이를 재촉하고 있다.서복문화광장에 서복상 1호 우뚝시멘트포장길을 30여분 달렸다. 감유현 금산현 서복문화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 6m 서복상이 위용을 과시하듯 우뚝 솟아있다. 지난 1985년 건립한 세계 최초의 서복상이라고 한다. 진 주임은 “중국에 서복상이 세 개 있는데 서복의 고향인 이곳에 가장 먼저 세워 졌다”면서 “중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이니 당연히 세계 최초의 서복상인 셈이다”고 소개한다. 바로 옆에는 중국과 일본이 서복우호를 다짐하는 내용을 담은 자연석이 서 있다. 이 곳을 서복문화광장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광장과는 그 모습이 사뭇 다르다. 한적한 시골 길 옆에 동상과 비석만 서 있을 뿐이다. 소공원이나 쌈지공원 같은 느낌이다. 주변에는 녹차밭 36만㎡가 녹색 융단처럼 펼쳐져 있다. 서복녹차밭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녹차는 가공 과정을 거쳐 ‘서복차’라는 브랜드로 시판되고 있다. 인근에 서복을 모셔놓은 서복사(묘)도 있다. 지금의 서복사는 지난 1988년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오랜 옛날부터 이곳에는 서복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나라 때 재건했다는 기록과 이후 흥해사로 불리다 지난 1942년 사당이 헐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서복의 후손들은 청명(淸明/4월5일경)이면 해마다 이곳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제사 때는 서씨 후손 2000여명이 모일정도로 서복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이 높다고 한다. 서복사에는 이 마을에 전해져 오는 서씨의 족보도 전시하고 있다.서복의 고향 서복촌엔 서씨가 없다그렇다면 정말 이곳에 서복의 후손이 살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복의 고향이라고하는 서복촌이 있다. 서복고리(徐市故里)라는 표지석이 서복의 고향마을임을 알려 주고 있다. 지금도 100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서씨는 한명도 없다고 한다.서복차공장 대표이면서 감유구 서복회 상무이사인 위군여(韋君余) 씨는 서복촌 인근 금산진 토박이다. 여씨지만 자신도 서복의 후손이라고 밝혔다. 그는 “서복이 돌아오지 않으면 후손들이 피해를 볼까봐 동도를 떠나면서 후손들한테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성씨를 바꾸라고 했다”며 “서복조상의 말에 따라 후손들이 성씨를 바꾸거나 다른 마을로 이사해 정작 서복촌에는 서씨가 살지 않는 것이다”고 했다. 현재 까지도 서복촌에 서씨가 한사람도 살지 않는 이유라고 한다.진 주임은 “서복의 후손들이 서복이 동쪽으로 출항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마을을 서복촌이라고 이름 지었다.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대략 진나라 말기나 한나라 초기로 추정된다. 그 이전에는 서가촌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서복촌 인근 바닷가에 당시 항해를 위해 배를 만들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근처 포구에서 서복 일행이 1차 동도에 올랐다고 한다. 이 밖에도 감유구 앞바다에는 진산도(秦山島)라는 섬이 있는데 진시황과 얽힌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서복에 관한 전설과 유적은 산동성과 절강성에도 전해지는데 중국 일부학자들은 서복이 진나라 낭야군이 아닌 황현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산둥반도 북쪽해안지역 용구시는 감유구 서복촌과 함께 유력한 서복의 고향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서복이 동쪽으로 출항하기에 앞서 삼천 동남동녀와 함께 하늘에 재(齋)를 올렸던 곳이다. 산동성 낭야대는 서복이 2차 동도를 떠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서복이 진시황으로부터 불로초를 구해 오라는 교지를 받는 모습을 형상화한 대형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진시황이 이 곳에 행궁을 지어 머물렀다는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산동·절강성 등에서도 서복유적 발굴용구시가 서복의 고향으로 주목을 받고는 있지만 관련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용구시가 지난 1998년에 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진나라 방사 서복의 고향’이라는 표석도 마련해 놓았다. 용구시는 지난 1999년부터 해마다 서복문화축제를 대규모로 개최해 오고 있다. 서복 관련 국제학술대회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근엄한 얼굴로 앉아 있는 서복 그의 양쪽은 불로초 탐사에 나섰던 동남동녀의 모습도 함께 하고 있다.강소성 남쪽에 위치한 절강성은 서복이 삼천 동남동녀를 모집한 곳으로 전한다. 이곳에도 서복상과 서복이 동남동녀를 모집하는 장면을 묘사한 조각상 등을 건립, 서복 동도를 기리고 있다.여운항시 감유현 주원리(周云利) 홍보주임겸 부진장은 “서복은 진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한국과 일본에 전파해 현지의 문화를 이끈 매우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다. 실존인물 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서복을 숭배하고 있다”며 중국인, 특히 서복이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동부해안지역 주민들은 서복에 대한 관심과 존경심이 매우 높다고 소개했다. 중국은 지금 2200여년전 서복이라는 인물에 대한 연구와 전설 등을 발굴하는 작업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강소성 연운항시와 산동성 용구시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앞다퉈 서복의 고향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고 있는 것만으로도 중국 현지의 서복역사 복원을 통한 마케팅연계 노력을 체감 할 수 있었다.최경인·정세윤 기자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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