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아련한 추억에 빠져든다. 향우들은 고향 함양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그립고 애틋하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고향 함양에서의 삶 보다는 타지의 삶이 대부분인 향우들은 언제나 고향 함양의 일이 우선이다. 향우회를 만들고 동창회에 참석하고, 같은 고향 함양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진한 형제애를 나눈다. 고향 일이라면 한달음에 달려와 고향과 지역 발전을 위해 힘쓴다.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에서 함양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재경 향우들. 고향 함양을 그리며 살아가는 재경향우회와 각 읍면 향우회를 통해 팍팍했던 서울살이와 현재의 삶, 그리고 향우 등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편집자주> 고향 사람들만이 느끼는 끈끈한 정, 그것이 저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지난 6월 수동면 소재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진 한 점이 면사무소 내부에 걸렸다. 60×120cm의 대형 사진은 수동 출신 향우인 김재상(73) 재경 수동면향우회 회장단회장이 직접 드론을 이용해 촬영한 것이다. 고령임에도 고향 수동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두 팔을 걷어 부치는 김재상 회장. 그는 수동면 재경 향우회와 산악회, 수양회, 경수회 등 4개 단체 회장단 모임의 회장으로 아직도 현역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수동면향우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아직도 재계는 물론 향우회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재상 재경 수동면향우회 회장단회장을 만나 그의 삶과 수동 향우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김재상 수동면향우회 회장단회장 그가 사랑하는 수동평생 일군 터전인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금정하이플렉스에서 김재상 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김 회장은 건축자재공장인 금정하이플렉스와 충남 태안군에서 새섬리조트를 운영한다. 수동면 효리 출신으로 수동초와 수동중(6회)을 졸업한 김 회장은 어느 누구보다도 고향 수동 사랑이 남다르다. 지난 6월에도 직접 촬영한 고향 수동의 사진을 전한 것도 고향 수동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자부심 때문이다. “저는 고향 사람들을 너무도 좋아합니다. 고향 사람들만이 느끼는 끈끈한 정, 그것이 저를 지탱하는 힘입니다”평생을 일군 금정하이플렉스 “금정하이플렉스는 공조설비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으로 후렉시블 닥트의 생산기계를 자체 개발하면서 이 분야에서는 국내 최초로 기계화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이어 1987년에는 업계에서 처음으로 해외 수출에 성공했고 1994년에는 미국 UL마크와 ISO 9002 인증을 최초로 획득했지요” 평생을 노력해 일군 금정하이플렉스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가득했다. 충남 태안군의 새섬리조트 역시 그가 운영한다.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위해 마련했던 곳이 이제는 그의 또 다른 사업장으로 바뀌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북 영주의 모 성냥공장이 첫 일터였다. 성냥 원목인 버드나무가 많이 났던 영주는 철도의 중심지였다. 우연히 일하게 된 것이 15년이란 기간을 그곳에서 일하게 됐다. “월급쟁이 생활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원하는 사업을 배워보기 위해 일했습니다. 우선은 3개월만 배워보자고 한 것이 15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함양과 먼 영주에는 수동 사람들이 올 일도 없었다. 친구도 그립고 고향사람들이 그리웠다. “어느 날 내 할 일을 찾아서 서울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준비 없이 서울로 왔습니다.” 그는 언제나 가슴속에 남아 있던 꿈을 펼치기 위해 서울행을 택했다. 준비 없이 조금은 갑작스런 결정이었지만 그것이 신의 한수로 다가왔다. 평생 직업, 그가 선택한 길엄청난 고생길이었다. 소위 말해 무일푼, 100원짜리 하나도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친구로부터 선박 건조에 필요한 후렉시블 덕트(Flexible ductor)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무작정 사업에 뛰어 들었다. 그 때가 1983년 10월이다. 종업원 1명과 시작한 그의 사업은 제대로 된 영업망이 없어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종업원이, 그리고 밤에는 그가 직접 생산 현장에 매달리며 제품을 생산했다. “당시 이 업계는 완전 원시적인 방법으로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직접 생산 기계를 설계하고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후렉시블 덕트 생산 기계의 발명이며, 업계 기계화의 선구자였다. “아버지께서 남다른 손재주가 있으셨습니다. 부친 곁에서 하시는 일을 지켜보다 자연스럽게 기계 쪽 소질이 생긴 것 같습니다. 처음 기계를 고안한 이후 생산품을 봤을 때 눈물을 쏟기도 했습니다” 그의 손으로 만든 기계가 생산되고 제품이 쏟아지면서 인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또 수입에 의존하던 것을 역수출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후렉시블 덕트 해외수출이었다. 아시아 지역 12개국까지 수출했을 정도로 그의 제품에 대한 인지도가 높았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그가 고안해 낸 기계들이 동종 업계에서 사용되어 질 정도로 그의 안목과 기술력이 높았다. 어려움 이겨낸 승리 원동력 ‘수동’그의 사업 첫 시작은 서울 죽랑교 인근으로 사업자금이 1280만원이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였죠. 한 집의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부양해야 할 책임도 있었고, 나 자신의 욕망도 있어 힘들었지만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차비가 없어 청계천까지 샘플을 들고 걸어간 적도 있을 정도다. 금정산업사로 시작했던 그의 사업은 90년 금정플렉스로 사명을 바꾸고, 국내는 물론 해외수출까지 승승장구했다. 그런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IMF의 시련은 대형 건설쪽 납품이 많았던 그에게는 회사의 존립까지 위협했다. “부도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을 정도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었죠.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합니다.” 함양 수동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이었다. 최근에는 건설경기가 좋지 않고 동종업계의 가격 경쟁도 치열하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는 연구 투자를 통해 산업체 고열용, 자동차 검사장, 반도체 공장, 시스템에어컨, 렌지 덕트 등 안정적이면서도 고부가가치 산업에서 그가 생산하는 제품들이 들어가고 있다. 가장 큰 힘이 되는 수동향우회잘 다니던 회사를 나와 상경한 것은 친구, 고향 사람이 그리워서다. “어릴 때부터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장으로 통했을 정도로 리더십이 강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길 좋아했습니다. 향우회도 친구들을 대표해 나라도 나가야되겠다는 생각에 참여하게 된 것이구요.” 그는 재경 수동향우회의 큰 어른이다. 재경 수동산악회 창립 회장이기도 하다. 또한 수동인으로 자부심이 가득한 원로들의 모임인 경수회에서도 활동하고 있으며, 수향회 회장과 함께 재경 수동면 향우들의 정신적 구심점인 재경 수동면회장단 회장을 맡고 있다. 수동면회장단은 역대 회장을 역임한 이후 향우회의 원로로서 향우회 발전과 고향 사랑의 마음을 이어가자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한번은 재경향우회장직을 제안 받았었지만 향우와의 대결구도가 싫어 나서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는 권위 있는 회장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는 사근산성 추모위원회 성경천 회장을 친형처럼 모실 정도로 각별한 사이다. “그 분은 수동의 중심이자 큰 어른이십니다. 자란 곳이 같아 지금도 친형처럼 그렇게 가까운 사이죠.” 그는 고향 수동에서 크고 작은 행사에 대부분 참여한다. 대표적으로 사과꽃 축제와 사근산성 추모제, 총동창회 행사는 빠지는 경우가 드물다. “현재 수동향우회가 조금은 침체기인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수동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고향의 정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김재상 회장의 부인 김연희 여사는 여장부로 통한다. “아내가 보스 기질이 있어 가끔씩은 부딪히기도 하지만 사업뿐만 아니라 향우회 일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내조를 톡톡히 하고 있어 한결 마음이 편하다.” 김연희 여사의 내조 덕분에 그는 마음 놓고 향우회에서 일을 할 수 있다. 그는 늘 고향의 많은 일들이 궁금하고 친구 선후배들이 항상 그립다. “향우회를 기준해서 그 전과 후의 삶은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멀리 서울에서도 고향 수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 발전을 염원하고 있다는 것을 고향분들이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최경인 대표이사·최원석 서울지사장정세윤·강민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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