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 한다. 그 말은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이며 공존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사회성이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모임이라면 항상 즐겁고 활기차고 미래가 기대되는 모임일 것이다. 또 그 모임의 각기 개인의 삶 역시 질 좋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사회성은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판단 기준은 자신의 일상의 삶이 행복한지, 또는 그저 그런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사회성이 좋은 사람은 그저 그런 인생을 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사회성의 결과물들은 우리들의 삶을 항상 감동하게 하기 때문이다.이렇게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회성은 어려서부터 발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성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더욱 발전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들의 사회성을 위해 또래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적절한 시기에 유치원부터 시작하여 학교에서 공부하며 관계를 만들어가게 환경을 마련해주고 있다. 어떤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외면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이 아이는 부모에게 친구들 때문에 학교에 다니기 싫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모는 아이를 달래가며 학교를 다니게 하였고 마침내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게 되었다. 과연 이 아이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그러한 친구들 사이에서와 교사에게 좋은 사회성을 배우고 졸업을 했고 사회에서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아니다. 이 아이는 상처 속에서 사회성을 왜곡되게 배우게 되었고 그 이유로 사회생활이 어렵고 행복하지도 않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여러 사람 속에 속해 있으면서도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일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문제이지만 원인은 다른데 있다. 우리는 사회성을 좋게 하는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부모의 사회성이 자녀에게 그대로 답습된다는 것이다. 사회성이란 ‘너’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고, ‘우리’가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 주장과 타인의 주장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아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합의점을 찾아내려면 내 주장보다 타인의 주장의 내용을 잘 이해하여야만 한다. 다시 말해 내 것보다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먼저라는 것이며, 타인의 것을 이해하려면 큰소리치거나 잘못된 행동이 앞서면 안됨을 말한다. 종종 부모는 아이들의 감정이나 의견을 무시한다. 아이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견뎌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모르는 것을 이해시키고 알게 하는 것은 부모의 역할이다. 이해시키고 알게 하는 작업은 큰소리치거나 억압하거나 강요하는 게 아니다. 우선 아이의 감정을 공감할 때까지는 어떤 의견도 방법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자녀의 좋은 사회성은 철저하게 부모에게 달려있다. 대화하고, 이해하고, 받아주고, 격려하는 부모아래 자라는 아이는 좋은 사회성을 갖게 될 것이다. 반대로 아이의 기를 살려준다고 제멋대로 하게 둔다면 아이의 사회성은 낮아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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