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중 수교 25주년을 맞은 해다. 최근 사드문제와 위안부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한·중·일 동북아 3국의 관계가 다시 냉랭해 지고 있다. 하지만 한·중·일 동북아 3국의 서복(徐福)을 매개로한 역사·문화 교류는 그 어느때 보다 활발하다. 서복은 2200여년전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초를 찾아 동도(東渡)에 나선 인물이다. 그는 비록 전설 속 인물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불로초를 구하러 동도에 오른 게 아니라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한국과 일본에 전파한 평화사절이기도 했다. 주간함양은 ‘불로초, 서복의 꿈을 찾아서’라는 기획을 통해 함양을 비롯한 한국과 중국에 전해 내려오는 서복에 관한 전설과 자료, 각 지자체의 서복 마케팅 등을 재조명해 불로초의 고장 함양의 명성을 더 높이고 웰빙·고령화시대에 맞춰 지역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① 불로초와 서복 그리고 그의 발자취 ② 거제와 남해의 서복 이야기③ 제주도의 서복전설과 전시관④ 중국의 서복 마케팅 1⑤ 중국의 서복 마케팅 2 ⑥ 함양군의 항노화와 서복 마케팅 금산·해금강은 남해안 서복전설 ‘주무대’ 동남동녀 수천명과 장인 등을 데리고 중국을 떠나 동쪽으로 갔던 서복(徐福). 동도(東渡)에 나선 서복 선단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처음 닻을 내린 곳은 과연 어딜까? 우리나라 남해안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추정과 가설은 이들 지역의 서복전설로 정설화하고 있다.본지 취재팀을 9월 20일과 21일 이틀동안 남해안의 서복이야기를 찾아 경남 남해와 거제지역 현지 취재에 나섰다. 취재팀은 남해군과 거제시의 서복전설 현장을 답사하고 지역 서복회 등 관계자를 만나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봤다. 남해 금산 거북바위의 ‘서불과차’경남 남해군 상주면 금산(錦山)은 해발 681m로 그렇게 높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금산은 서복전설을 비롯해 숱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서복 일행이 새겼다는 ‘서불과차(徐市過此)’ 석각은 물론 진시황의 큰 아들 부소가 귀양을 살다갔다는 부소암 등 진시황과 관련한 설화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한려해상국립공원 내의 산악공원인 금산은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이씨기단(李氏祈壇)을 비롯, 삼사기단(三師祈壇) 쌍룡문, 문장암, 사자암, 촉대봉, 향로봉, 음성굴 등 금산 38경을 이루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발아래 펼쳐진 바다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황홀경을 연출한다.금산은 2200년전 서불이 남해에 왔었다면 불로초를 찾기 위해 머물고도 남았을 만큼 영험함과 비경을 뽐내는 명소이다.단순한 전설로 폄훼할 일 아니다산 정상 부근에는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이자 하동 쌍계사의 말사(末寺)인 보리암이 있고 그 밑에는 해수관음보살상이 바다를 향해 서 있다.본지 취재팀이 현지답사에 나선 9월20일 보리암에서 바라본 금산의 풍광은 한마디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산 허리 곳곳에 솟은 천태만상의 기암괴석과 단풍맞이 준비를 시작한 울창한 숲은 쪽빛 남해바다와 어우러져 한폭의 산수화나 다름 없었다.천하절경 금산을 무대로 남해의 서복전설은 2000년의 세월을 넘나들며 오롯이 전해지고 있다. 상주면 복곡삼리에서 상주해수욕장으로 가는 도로 중간쯤에 금산을 오르는 두모계곡 등산로가 있다. 등산로를 따라 25분쯤 걸어 산 중턱에 이르면 길 맞은편에 비교적 넓고 평평한 연석의 화강암을 만나게 된다. 거북바위다. 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뜻을 새긴 ‘서불과차(徐市過此)’ 석각이다.박창종 남해서복회장은 “거제도와 서귀포에서도 서불과차라는 석각의 전설이 전해 오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실물은 없다”면서 “상주면 양아리 석각은 현존하는 유일의 서복관련 석각이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또 “이 석각이 그림에 가까운 화상문자여서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금산의 서복전설과 너무나 일치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박창종 회장은 “양아리 석각의 서복전설 진위여부를 떠나 남해에는 수많은 서복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고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들도 얼마든지 있다”면서 “2200여년전 서복이 동북아 3국에 끼친 발자취를 살펴보면 서복전설을 단순히 전설로만 폄훼해서는 안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진시황 큰아들 부소도 머물러대다수 남해 군민들도 이 화상문자를 진시황 때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서복이 동남동녀 500여명을 거느리고 이곳 금산을 찾아 수렵 등을 즐기다가 떠나면서 새긴 것으로 알고 있어 서복전설에 대한 믿음을 보이고 있다. 이 거북바위 석각은 서불과차 또는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로 해석해 서복 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금산 기슭 상주면 두모마을에는 지난 2015년 5월 서복 조각상이 세워졌다. 이 서복 조각상은 중국 서복회가 한·중간 ‘서복 우호’를 기리기 위해 기증한 것으로 양아리 석각 인근 두모마을 주차장에 건립했다. 조각상은 높이 2.6m, 폭 1.2m, 무게 3t 규모로 서복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당시 서복상 건립식에는 박창종 남해서복회 회장을 비롯한 지역기관단체장, 중국서복회 관계자 등이 참석해 많은 관심을 끌기도 했다. 서복 조각상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금산 중턱에 부소암이 솟아 있다. “진시왕의 큰아들 부소가 귀양 와 살다 돌아갔다”거나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바위다. 금산 정상에서 두모계곡으로 30분쯤 숲길을 따라 내려 가다보면 갑자기 탁 트인 남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사람 뇌를 닮은 대형 바위가 바로 부소암이다. 서복상이 있는 두모계곡 입구에서는 1시간쯤 산길을 올라야 부소암을 만날 수 있다.조각상 건립 당시 박영일 남해군수는 “서복 조각상 건립을 계기로 한·중 상호협력과 교류 활성화를 도모하고 남해가 세계 관광도시로 도약, 중국 관광객뿐만 아니라 많은 외국인이 방문하기를 기대한다”며 세계 관광도시 도약의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 밖에도 미조면 설리마을의 지명유래도 서복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서복이 남해를 떠나기에 앞서 해변암석에 떠난다는 표시로 ‘서리고적(徐吏古跡)’이라하여 ‘서리곳’이라고 부른데서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태풍이 할퀸 우제봉의 ‘서복과차’거제도에는 해금강을 중심으로 한 서복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거제도에 전해져 내려오는 서복전설은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우뚝 솟은 거제시 남부면 해금강(海金剛) 일대가 주무대다. 지금으로서는 이렇다 할 역사적 근거와 자료는 없는 게 현실이지만 이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서복전설만큼은 전설이 아닌 정설처럼 또렷하다.갈곶에서 약 500m 해상에 위치해 맑은 날은 손을 쭉 뻗으면 잡힐듯하다. 사자바위가 북쪽에 떨어져 있고 큰 바위는 한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바닷속에서 넷으로 갈라져 4개의 절벽 사이로 십(十)자형 수로가 뚫려 있다. 이 수로는 북·동·남쪽에서는 작은 배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다.해금강 인근 갈곶마을에서 나고 자랐다는 한 주민은 “실제로 불로초가 있는지 모르지만 어릴 적부터 동네 어른들에게 해금강에 불로초가 있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바닷가 암벽에는 서불이 이 곳을 지나갔다는 뜻의 ‘서불과차’라는 것도 새겨져 있었는데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떨어져 나갔다고 들었다”며 해금강의 서복전설을 전해 주었다.서불과차가 새겨졌던 것으로 알려진 곳이 바로 우제봉(雨祭峯) 절벽이다. 우제봉은 서복이 불로초를 캐기 위해 제를 올렸던 곳 또는 서복이 기우제를 지냈던 곳으로 전해진다. 불로초를 구하러 온 서복은 당시 중국의 선진 어로기술과 농업기술 등도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기우제를 지낸 곳이라는 설에도 무게가 실린다.우제봉 절벽에 새겨졌다는 글자를 찾기는 힘들지만 취재진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떨어져 나간 암벽의 흔적이다. 떨어져 나간 암벽 조각은 눈대중으로도 족히 30㎡는 넘을 것 같다. 이정도면 서복과차라는 네글자 말고도 수많은 글을 새기고도 남을만한 크기다.사자암에서 그네타고 노닌 서복박경호 거제서복회장은 “분명한 것은 우제봉 암벽에 떨어져 나간 부분과 기존 부분의 암벽 색깔이 다르다. 약 10~20㎝로 두께로 편층으로 갈라지듯이 떨어져 나간 부분을 육안으로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면서 “해금강 인근 주민들은 어릴적부터 마을 어른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은 이야기라 실제라고 믿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우제봉 암벽에 새겨진 글씨가 사라호 태풍 때 거센 파도와 바람에 떨어져 나가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이성보(71) 거제서복회 고문은 “서복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해금강에 왔다가 암벽에 서불과차라는 글을 새겼다는 전설은 거제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면서 “서복이 해금강 풍광에 빠져 상당기간 이곳에 머물렀을 것이다”고 추정했다. 이 고문은 시조시인이자 동부면에서 자연예술랜드를 운영하고 있는데 서복전설에 관한 연구자료를 국제학술대회 등에서 여러차례 발표한 지역 원로이기도 하다.이 고문은 또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있는 해금강은 서복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해서 약초섬으로도 불렀고 서복이 그네를 타고 놀았던 섬이라고 해서 굴레섬이라고도 한다”고 덧붙였다. 이 고문은 “서불과차라는 글씨가 새겨진 우제봉을 마을 사람들은 서가람산(徐伽藍山)이라고 부르는데 가람은 절터의 다른 말로 서불이 은둔한 곳이라 이름 붙여졌다”고 말했다. “해금강 본 섬 북단에는 사자바위가 있는데 이 사자암을 옛날에는 ‘굴레섬’이라 했다”는 이 고문은 굴레라는 말은 그네의 사투리로 서복이 해금강의 천년송 바위와 사자암에 그네를 타고 노닐었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했다.서복 일행 와현마을에서 유숙박경호 거제서복회장은 해금강이 한눈에 보이는 일운면 와현마을의 서복 전설도 들려주었다. 와현마을에는 불로초를 구하러 해금강을 찾은 서복 일행이 숙식하며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거제서복회와 거제시는 이곳 마을공원에 서복유숙기념비를 세워 서복을 기리고 있다. 또 와현마을 위쪽 도로변에 약수터가 있는데 자연석에 ‘서복장수샘’이라고 새겨 서복이 와현마을에서 유숙할 때 이곳 약수를 마셨다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 박경호 회장은 서복의 이미지에 맞게 조만간 새단장을 해 서복약수터로 이름도 바꿀 예정이라고 말했다.거제서복회와 일본 야메시서복회가 자매결연을 맺어 활발한 교류와 연구활동을 벌이자 이것이 계기가 돼 거제시와 야메시가 두 도시간 자매결연을 맺고 서복정신을 나누고 있다. 강대용·정세윤·강민구 기자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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