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기다리게 하는 꽃이 있다. 금목서. 지난 해 가을비에 아쉽게 이별한 뒤 나는 이 꽃을 365일 기다렸다. 물론 나는 봄이 되면 모란 작약을 기다리고 장미가 피기를 기다린다. 여름이면 부용을 기다리고 가을 국화가 언제 피나 눈여겨본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때가 되어 기다리게 되는 것들이고, 내가 금목서 꽃을 기다리는 것과는 완전 다르다. 금목서는 겨울부터 봄 여름 가을까지 계절을 당겨가며 기다리게 된다.
지난 해 가을엔 가을비 치고 좀 세게 내렸다. 가을비는 황금 동산처럼 풍성한 금목서 꽃을 한방에 다 떨궈 버렸다. 넘 아쉬웠다. 화무십일홍이라 마음에 드는 꽃을 항상 내 곁에 둘 수는 없는 것이지만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너무 일찍 가버리면 참 섭섭하다. 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안녕~하고 돌아서는 연인처럼 정말 유감스럽다.
하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어 금목서가 다시 찾아왔다. 앞마당 돌담 앞 금목서가 황금색 꽃을 활짝 피웠다. 만리향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향기가 넘친다. 향기의 바다는 가벼운 바람이라도 불면 파도가 되어 넘실넘실 다가온다. 나는 금목서 앞에 서서 향기 샤워를 한다. 가슴을 펴고 두 팔을 벌리고 숨을 크게 들이키면 달콤한 향이 가슴으로 스미고 피로 녹아드는 느낌이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펌프질을 하면 손끝 발끝 머리끝까지 향이 전해진다. 아침햇살에 투영된 금목서 꽃은 아주 작은 꿀벌 수천만마리가 앉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손을 뻗어 건드리면 수천만 마리의 꿀벌들이 부웅하고 한꺼번에 나에게 달려들어 향기로운 침을 쏠 것이다.
정말이지 마당에 금목서 한그루 있으니 왕의 정원이 부럽지 않다. 거대한 성과 수 만평의 정원을 소유한 유럽 백작도 금목서가 없다면 별로 부럽지 않다. 금목서는 두 그루도 필요 없는데, 한 그루만 있어도 향이 만리를 가서 수만평의 정원에 달콤한 기운을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 앞마당에 있는 금목서는 수령이 20년 쯤 되었다. 꽃이 절정인 날은 향기가 엄천 골짝은 물론이고 엄천강까지 흐른다.
이제 시원하고 걷기 좋은 가을이다. 마침 주말이라 지리산 둘레길 걷는 사람들이 달콤한 금목서 향기에 이끌려 마당으로 들어왔다. (우리 집은 지리산 둘레길 4구간이 지나가는 길가에 있는 펜션이라 가끔 둘레꾼들이 들러 물도 마시고 땀도 식히고 간다.) 코를 킁킁거리며 이 향기가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거냐고 묻는 둘레꾼에게 나는 활짝 웃으며 금목섭니다~ 하고 말해주었다. 내 목소리가 너무 자랑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 담담하게 말은 했지만 표정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아~ 이게 금목서구나~하는 사람도 있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는 사람도 있다. 가만있어도 향기가 진한데 사람들은 황금빛 꽃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오감으로 즐긴다. 어떤 사람은 한줌의 꽃을 따서 손바닥에 담아간다. 아닌게 아니라 금목서 꽃을 그늘에 천천히 말린 뒤 살짝 덖어 차로 마시면 맛이 기가 막히다. 꿀꺽 한 모금만 마셔도 온 몸에 향이 스며들고 몸이 가뿐해진다. 금목서 꽃은 샤넬 넘버5 향수 원료로 사용된다는데, 나는 이번에 술을 한번 담아보려고 한다. 화이트와인에 황금빛 금목서 꽃을 담아 향기가 충분히 우러나면, 다음 해 금목서를 기다리며 한잔씩 마실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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