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으로부터 무저항 독립운동을 일으킨 인도의 정신적 지주인 마하트마 간디의 언행은 너무나 유명해서 많은 격언집이나 감동어린 글에 인용되곤 한다. 그 중 열차 안에서의 신발 사건은 간디의 인간됨을 알려주고 있다. 그가 기차를 타기 위해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열차에 간신히 탔는데 그만 신고 있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밖으로 나뒹굴어졌다. 그러자 간디는 남은 신발을 벗더니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일행이 깜짝 놀라 왜? 마저 있는 신발을 창밖으로 던졌는지 묻자 간디는 “누군가 나의 신발을 줍게 될 것인데 한 짝만 있으면 신을 수 없으니 내게 남은 신발을 그 사람이 신을 수 있게 벗어 던졌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인도국민을 향한 간디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외에도 배려와 관련된 일화와 격언은 우리 주변에 무수히 많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사회가 이러한 배려가 넘치는 사회가 되어야 할 터인데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우리 국민들에게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의 정서가 깊이 있음을 안다. 특별히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지금보다는 가난하고 힘들었던 지난 과거의 모습을 보면서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다”라는 속담에 담겨있는 배려의 진한 향수를 그려볼 때가 있다. 지금은 공중전화가 휴대폰과 스마트폰에 밀려 많이 사라지고 있지만 그 전에는 도로에나 골목에나 많이 설치되었는데 가끔씩 보면 수화기가 머리 위에 놓여져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았다. 아직 통화할 동전이 남아 있는데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다시 영점이 되어 돈을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통화하고 남은 금액을 다른 사람이 와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고 몸통 위에다 올려놓는다. 나도 어느 때 그런 혜택을 받아 무상으로 통화를 했던 일이 있었고 나도 그런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내게 남은 금액이 있어도 같은 방법으로 수화기를 올려놓았다. 이토록 아날로그 시디에는 우리 주변에 참으로 배려하는 문화가 많았음을 본다. 그런데 빠르게 진행되는 디지털 시대가 도래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남을 배려하는 착한 마음들이 시들해지고,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배려는 떨어지는 낙엽이 되어 땅에 떨어져 우리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멀어져 가게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성공의 척도는 그가 얼마나 돈을 벌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뿌렸는가? 이라고 어느 현자가 말했듯이 우리사회가 이제 사람들을 평가할 때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베풀고 살아가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평가하기를 원한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존경을 받는 사람은 드물다. 존경은 그 사람의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지표도 중요하지만 행복지표도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필요한 요소들이다. 우리나라가 안정되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한 노력은 전방위에서 일어나야 한다. 왜? 정치를 하고, 왜? 사업을 하고, 왜? 공부를 해야 하고, 왜? 일을 해야 하는지 하지만 그 중심을 이끄는 것은 바로 남을 배려하는 친절과 봉사와 섬김이어야 하고 이것이 모든 영역에서의 활동 목표가 될 때 그 기능들이 올바르게 발휘될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이러한 것들이 나를 위하여, 내 명예와 영예를 그리고 부를 위하여 쫓았기에 지켜지지 않았다. 노인석에 앉은 젊은이, 장애인 주차장에 주차한 일반차량, 등등 배려의 장치는 있었지만 사람들의 이러한 이기심으로 인해 작동되지 못했다. 인도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형제의 배가 항구에 도착하도록 도와라. 그리고 살펴라. 그러면 당신의 배도 무사히 항구에 도착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군인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자신의 가족을 지키는 것이 아름답지만 가족이 지켜져서 안전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사실은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는 운명공동체라고 하지 않았는가? 북한의 핵미사일로 우리나라 전체가 위협을 받고 있다. 여기는 함양이라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무관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국의 펄프스 시인이 쓴 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 신실한 믿음과 마음으로 형제를 향한 사랑과 친절한 위로를 누구에게나 베풀게 하옵소서!” 남을 배려하지 않는 문화 속에서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큰 고통을 받지만,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아가며 자신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발휘되는 사회는 분명 배려가 가득한 사회이다. “자신에게 화났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 고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돌아보자.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다면 먼저 대접하라” 이 말씀이 배려에 대한 귀한 교훈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분명 사람들과 맞대며 그 공동체 안에서 살아간다. 내가 살아오면서 알든 모르든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 그리고 친구들 그리고 이웃들의 배려 속에서 자라왔고 지금까지 지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리 될 것이다. 내가 받은 배려를 계속해서 이웃을 향해 뿌려나가 이 나라가 관심과 배려의 아름다움으로 물들어 가기를 가을을 맞이하는 문턱에서 깊이 생각하며 기도한다. 배려 그것은 사랑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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