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포네의화폐는참으로광이나고메달로하여도좋을만하나기독의화폐는보기숭할지경으로빈약하고해서아무튼돈이라는자격에서는일보도벗어나지못하고 있다카포네가프렛상으로보내어준프록코오트를기독은최후까지거절하고말았다는것은유명한이야기거나와의당한일이아니겠는가.이전 편에서 다루었던 조감도의 다음 부분이다. 당시 조선의 상황과 연관 짓는 방식을 다시 사용한다면, 친일파들은 엄청난 돈과 권위를 앞세워댄 반면, 숭고한 독립 운동가들은 변변한 돈도, 명예도 당시에 확립되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 둘만을 기준해 세상은 어떤 것이 더 나은가를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친일파들의 끝없는 유혹을 독립운동가들은 끝까지 거절했고, 이것이야말로 의당한 일이라는, 나름의 항일 저항시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상의 문학에서 “뚱뚱보”가 차지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보려 한다.
우선 이상의 문학에서 “뚱뚱보”가 등장할 때면 그것은 부정적인 인물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휴업과 사정>에서는 이상 자신을 투영한 주인공 보산과 보산의 옆집에서 “보산의 집에 침을 뱉어대는 더러운 뚱뚱보 SS” 사이의 구도를 그려내는가 하면, <지주회시>에서는 뚱뚱보 주인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뚱뚱보 SS는 자신밖에 모르며 타인의 집의 마당에 자신의 마당의 그것인 마냥 침을 뱉어대며 사과는 하지 않고, 주인공 보산은 그런 뚱뚱보 SS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하며 그에게 지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모두 공상에 그치고 만다. 반면 지주회시의 뚱뚱보 주인은, ‘자본가’이다. 이 뚱뚱한 자본가는 항상 돈을 타인에게 빌려주며 ‘타원형 도장’을 찍어대고, 그에게 주인공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만다. 이 두 상황에서 주인공의 공통점은, 직접 무언가를 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글로 써보고 돈을 받고 자본가의 여인을 훔쳐보려 애쓰기도 하지만 결국 그 본인들에게 저항해보지는 못한다. 심지어는 그들의 문화적 관습(뚱뚱보 SS는 자식을 출산했다고 고추를 밖에 내걸었다), 사회적 지위 때문에 절망하기까지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하면, 저 뚱뚱보 알 카포네는 자본가로, 그의 돈은 참으로 광이 나고 메달로 하여도 좋을 정도로 많은 반면 왜소한 목사의 화폐는 보기에 힘들 정도였지만 어쨌든 그것도 돈이라는, 자본 사회에 대한 절망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우리는 지금도 뚱뚱보의 화폐에 열광하고 있다. 그들이 ‘감람산을 훔쳐갔’든, ‘입장권을 팔았’든, 어쨌든 그들의 화폐에서 광이 난다면 열광한다. 그러나 기독이라는 이상한 부류는 카포네가 프렛(프레트, 룰렛 게임에서 번호가 매겨진 포켓을 분리하는 메달 칸막이이다) 상으로 보내준 그 아름다운 프록코트를 끝까지 거절했고, 그 이야기는 ‘유명’하며 ‘의당’하기까지 하다. 1930년대에는 1910년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일본의 자본 문명이 (당시 명칭으로는)조선에 깊이 침투하는 과정을 마쳐 너도 나도 돈에 매료된 시기였다. 그런데 기독은 의당하게 그 프록코트를 거절한다. 남들은 한 번이라도 입어보고 싶어서 열광하는 그 비싸고 멋진 코트를. 지금은 굳이 프록코트가 아니더라도 심지어는 연필, 아이에게 사줄 장난감 따위도 알 카포네가 만든 것에 더 애착을 가지고는 한다. 기독이 되는 일은 점점 더 멍청한 일이 되어 간다. 사람들은 그리고 돈을 버는 일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무의식이 되어 갔다. 이상에게 그런 부류들은, 계단에 굴러 떨어져 죽어버려야 하는 거미들이자, 자신밖에 모르는 뚱뚱보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게 누군지도 채 생각나기 전에 어언간이 뚱뚱이에게 고개를 수그리지 않았나. 지금. 지금. 골수에 스미고 말았나 보다. 칙칙한 근성이 -모르고 그랬다 하면 말이 될까? 더럽구나.”-지주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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