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함양의 양파 전쟁은 승리로 결판이 났다. 다른 지역에 비해 작황이 좋았으며, 가격 또한 역대 최고였다. 다시 또 9월 초가 되면 양파 모종을 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50일 전 모종밭을 준비하고 비닐을 덮어 땅을 소독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그리고 파종에 사용할 톱밥을 구입하여야 한다. 언젠가 시일이 다 되어 톱밥을 사러 갔더니 줄을 한참이나 서야 했고, 그러고 나서도 톱밥을 싣고 오려면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한다기에 낭패를 본적이 있다. 그래서 올해는 미리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작목반에서 톱밥 지원 금액이 정해지지 않아서 발걸음을 돌렸다. 혹시나 해서 21일 톱밥공장에 들렀더니 웬걸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중에 한마을에서 자란 친구가 보인다. 손을 잡으며 “톱밥 사러왔느냐?”고 물었더니, “톱밥을 모시러 왔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톱밥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적은 양이라 바로 싣고 올수 있었다. 입구에 나오니 톱밥을 한가득 실은 트럭이 길을 막고 줄을 매고 있다. 톱밥을 모시는 심정을 서로 알기에 기다린다. 꽤 긴 시간을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인사를 하고 가시는 톱밥을 모신 농사꾼의 뒷모습에 인생의 무게가 느껴진다. 양파 씨앗을 뿌리고 난 다음 톱밥을 덮는다. 톱밥은 씨앗을 보호한다. 온도와 습도를 조절한다. 유실을 막는다. 그러고 난 다음 땅에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거름이 된다. 한알 한알의 톱밥은 얼마나 하찮은가? 얼마나 작은가? 얼마나 미약한가? 그러나 그 작음이 모여서 쓰이고 있다. 그 약함이 모여서 가치를 발하고 있다. 함께하므로 모심을 당하는 귀한 존재가 된다. 그들에게 다툼이 있겠는가? 그들에게 경쟁이 있을까?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아도 그 쓰임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언제부터 우리 신앙은 경쟁하고 있다. 주님의 제자로서 그 도를 따르는 거룩한 경쟁이 아니다. 자기 과시형 신앙에 젖어 있고, 그것이 교만인지도 모르고 있다. 교만하여 다투어야 하고, 교만하여 자기를 과시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교회도 자기를 과시하기에 본질적 존재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신도수를 자랑하고, 건물을 내세우며, 돈을 사랑하고 있다. 목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도구로 하여 자기를 과시하는 올무에 걸려 있지는 않은가? 교회안의 직분을 자기 과시형 도구로 전락시켜버린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봉사에 감사가 있는가? 봉사가 은혜에 젖어 있는가? 봉사에 희생하는 기쁨이 있는가? 봉사를 통하여 겸손을 배우고 섬김을 배워야 하지 않는가? 봉사를 통하여 자기 이름을 높이고 있다면 반그리스도적 신앙이다. 자랑하려거든 주 안에서 자랑하여야 한다. 우리는 부끄러움 가운데서 불러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작음이 모여 일을 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약함이 모여 강함을 부끄럽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자요, 죽는 자 같으나 살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스스로 높이지 말자. 스스로 자랑하지 말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는 자니라>(고후10:18).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6:3). 자기 과시형 신앙을 철저히 경계함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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