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휴천 운서마을의 모씨댁 장롱 속에 잠자고 있던 고서 ‘한오대 계안’을 얼마 전에 소개한 적이 있다. 모두 한문으로 되어있어 한문만 보면 머리가 아픈 나로서는 이러이러한 서책이 있더라는 정도로만 언급하고 말았는데, 이것을 재야 한학자 이재구 선생이 시원하게 국역을 해주어 흥미로운 사실이 새로 알려지게 되었다. 원문으로 읽기도 어려운 문장을 폭염을 견뎌가며 국역해주신 선생께 엄천골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재구 선생은 지리산 문화재에 관심이 많아 엄천골에 살았던 구한말 선비 강용하의 ‘무산유고’에서 화산12곡을 찾아내 국역하고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또 다시 엄천골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한오대 계안’을 국역한 것이다. 그런데 책상에서 돋보기 끼고 단순히 자판만 두드린 게 아니라 원문에 나오는 내용을 고증하기 위해 부산에서 엄천골까지 수차례 왔다 갔다 하였다 한다. 단언컨데 선생의 이런 수고는 엄천골의 문화 관광지도를 새로 만들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국역 자료에 의하면 1897년에 휴천 소연동( 현재 운서리, 엄천강이 보이는 지리산 끝자락 가파른 골짝에 제비집처럼 걸려있는 동네 )에 사는 강정희를 중심으로 몇몇 유생들이 한오대 계를 만들었다. 명분은 비운의 왕자 한남군의 충정을 기리고 이 땅에 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대여섯 명이 시작하였는데 20년 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에는 계원이 23명으로 불어나게 된다. 이 때 한오대 바위에 계원 23인의 이름과 함께 ‘한오대’, ‘이한남군장구소’(한남군이 노닐던 곳)라는 각자를 새긴다. 한오대 계안은 한오대서/한오대계회사실/한오대명/한오대기/한오대발/한오대계원명부/추가명부/한오정기로 구성되어 있고, ‘한오대경임안’(142쪽) 이라는 회계 장부가 별책으로 만들어져 있다. ‘한오대 경임안’은 1897년부터 93년간의 기록을 한권으로 묶었고, 그 이후는 새로운 장부로 만들어져 있다.엄천골에는 한오대계 외에도 용유담 인근의 구룡계가 있었고 화산제4곡 와룡대를 중심으로 와룡계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한오대계가 가장 규모가 크고 활성화되었다고 전한다. 한오대 계는 120년 전 소연동의 강정희를 중심으로 대여섯 명이 시작하여 20년 후 계원이 8개 자연마을, 23명으로 불어났다. 이후에도 계원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휴천 지역에 행세하는 모든 성인남자들이 가입하게 되는데 46개 성씨에 127명까지 명부에 보인다. 이것은 그때 당시에 한오대계가 단순한 친목계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는 지리산 깊은 골짝 노장동과 당두재 너머 미천, 대포, 대천 사람까지 가입을 하였는데, 한오대계를 일제시대 어려운 시기를 견대내기 위한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뭉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계원들이 많이 불어나니 모임의 상징적 역할을 할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을 것인바, 늘어난 계원들로 탄력을 받은 한오대계는 한오대 근처 새우섬(오서)에 한오정이라는 정자를 짓게 된다. 3칸짜리 당당한 정자에 청기와를 얹어 계원들이 소통할 수 있는 거점으로 탄생한 것이다. 한오정 낙성식장은 요새말로 지역축제의 장이었다. 한오정 낙성을 계기로 한오대 계는 절정에 이르는데 호사다마라고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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