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550년 전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재직할 때 지리산을 유람하고 ‘유두류록’이라는 명품 산행기를 남겼다. 김종직은 불혹의 나이에 함양군수가 된 뒤 관내에 있는 지리산을 유람하고 싶어 했으나, 가뭄과 민생 업무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2년 후 중추(仲秋)에 기회가 생겨 4박5일로 지리산 유람을 하였는데, “나이가 들어 갈수록 기력이 쇠해져서 살아생전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고 한다.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인류의 평균 수명이 37세였다고 하니, 김종직이 40대에 ”지금이 아니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고 한 것이 이해가 된다.
김종직은 유두류록 말미에 “5일간의 유람을 마치고 마천으로 내려왔는데 내가 유람하는 동안 아무 탈도 없었다는 하례를 받고 비로소 백성들이 내가 유람하느라 일을 폐했다 하여 나를 허물치 않으니 기쁘다.”라고 기록했는데, 목민관으로서 그의 자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얼마 전 지역구에 최악의 물난리가 났는데도 유럽으로 외유성 연수를 갔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허겁지겁 되돌아온 턱이 멋진 모 도의원과는 비교불가다.
김종직은 함양 관아에서 말을 타고 엄천을 지나 화암에서 쉬었다가 지장사에서 말을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 짚고 산행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선열함, 신열암을 거쳐 고열암에서 해가 저물어 일박을 하였는데 여기 언급된 암자는 모두 오래 전 없어지고 지금은 기록에만 남아있다.
이제는 거의 전설이 되어버린 유두류록을 읽다보면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함양관아에서 엄천을 지나 화암에서 쉬고 지장사까지는 말을 타고 갔다는데 어느 길을 따라 갔을꼬? 지장사는 어디에 있었던 절이고 또 선열함, 신열암, 고열암은 또 어디에 위치했을꼬? 엄천을 제외한 이 모든 지명들은 사라진 지 오래된 것들이다. 하지만 산에 위치한 절이나 암자라면 아무리 오래전에 사라졌어도 주춧돌이나 기와 조각같은 흔적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흔적을 찾아서 유두류록 길을 복기해 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김종직은 4박5일 두류산(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시도 많이 남겼는데, 그 주옥같은 시를 읊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음미해 보면 더 좋을 것이다. “소나무 파도가 달빛 아래 들끓으니...” 하고 고열암에서 명품 시를 읊조리며 쐐주 한 잔 하면 신선이 동무하자고 찾아올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십수년 전부터 그 재미있는 일을 해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재미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지 못할 일인데, 류정자 선생과 지종석 선생등은 서울에 살고 있으면서도 지리산이 좋아 지리 아흔 아홉 골에 숨어있는 역사와 문화를 찾아다니는 일에 신명을 다하고 있다. 김종직이 첫날밤을 보냈다는 고열암을 찾기 위해 휴천 운서마을 뒷산인 노장대를 아홉 번 올랐다고 하는데, 운서마을에 사는 나도 어려운 일을 서울에 살면서도 뒷산 오르듯 다녀갔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얼마 전 함양문화원에서 유두류록 문화사업과 관련된 탐구산행 요청이 있어, 류정자 선생이 서울에서 내려오시고, 함양문화원 심 팀장, 나, 그리고 지리산국립공원 직원까지 4명이 유두류록의 첫날 코스를 답사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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