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소설가와 시인으로 데뷔하는 방법으로 많이들 인식하고 있는 것은 신춘문예다.최근에는 문예지를 통해 데뷔하거나 이런 제도와 상관없이 자작 작품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일반인이나 연예인도 생기는 중이지만, 아직 문단계에서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신춘문예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신춘문예 제도가 더 이상 유효하냐는 것이다.
실제로 활동하는 작가는 많지 않다. 그리고 엄연히 한 대회 같은 것에서 수상한 작품이니까 뭔가 신선하거나 깜짝 놀랄만해야 하는데, 왜 작위적이고 뻔해 보이거나 괴상하기 짝이 없을까?
동아일보의 자료를 인용하면, 2000~2002년 8개 일간지 신춘문예의 당선자 중 실제 활동자는 2012년 기준 10명 남짓이다. 자신의 이름으로 단 하나의 작품을 내지 못한 사람이 21명, 1권 정도 낸 사람이 12명으로 약 70%는 사실상 문단에 이름만 올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당선된 이들 중 확인이 가능했던 29명 중 약 30%는 심지어 문학과는 거리가 먼 직업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나마 2000년대 초반의 이야기라는 것에 더욱 충격받아야 할 것이다.
지방신문들 중 세력 있는 도(道) 신문 등의 경우엔 2000년대 이후 신춘문예를 자체적으로 개최하기 시작했고 신춘문예 당선 인구는 더욱 증가했다. 2016 신춘문예의 공모 부문은 개최하는 신문들의 각 종목들을 모두 합치면 99개나 된다. 매년 99명의 신인들을 배출한다는 것이다. “문학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다”라는 옛날 말이 있듯 등단은 했지만 이후 창작에서 한계를 느낀 비율이 많은 것 아니냐는 말도 할 수 있겠지만 해외에서도 이는 다르지 않다. 매년 많은 작가 유망주들이 자신의 작품이 당선되거나 출간사에서 뽑아주고 이 작품이 당당히 서점에 이름을 올려, 조금 더 야망을 품자면 이렇게 베스트셀러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걸 감안하면 99명이라는 등단 작가 숫자는 오히려 많은 셈이다. 그리고 단순히 수 대비 활동 수가 적다기엔, 신춘문예만의 심각한 문제가 있다. “독자를 거부한다.”
예를 들어 2016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이자 2016 신춘문예 최고의 논란작이었던 <상식의 속도>의 한 문장을 보자.
“문화의 형성기부터 혈연과 가족을 중시해온 동양권에서 특히 그러했는데, 한 예로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한 소국에서 만들어진 창작물 ‘The Little Dinosaur Dooly’를 들 수 있다.”
상당히 작위적이기 짝이 없는 문장이다. 많은 이들의 아기공룡 둘리에 대한 기억은, 그저 둘리와 그들의 가족이 살아가는 일상을 보고 웃었던 것이다. 이 앞의 문장은 가족주의의 무한신봉에 대한 비판인데, 하필 그 예시라는 게 아기공룡 둘리이다. 전혀 와 닿지가 않는 문장이며 이것이 주인공의 가족에 대한 갈등을 부각하는 소재라는 식으로 작품이 진행된다. 게다가 이는 극히 일부분이다. 당선 소설이 이 모양이니 시 부문 당선작인 <생일 축하해>도 “그나마 독자와 소통한 작품”이었다고 당선평에 나와 있다. 국내에서 최고 권위를 지닌 일간지의 하나인 조선일보의 신춘문예가 이 모양이라면, 다른 신춘문예도 기대하기 힘들다. 더욱이 어느새부터인가 신춘문예 레슨이라는 게 등장해 신춘문예 평가 작가들의 입맛에 맞는 일회성 소설을 쓰는 방법마저 교육되고 있다고 한다. 소설가 박민규 씨가 계간지 에서 인터뷰한 내용 중 “소설에는 레슨이 없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어쩌면 틀렸나보다. 기성 작가들이 매년 거의 비슷한 라인업으로 비슷하게 작품을 평가하니 결국 장사꾼들에게 읽혔다. 매년 80년대 독자들에게나 통할 관점을 21세기에 적용하니 다들 신춘문예 작가를 꺼리는 것이다. 다들 시대를 잘못 만난 명작가들이시다. 그러나 신춘문예를 지지하려는 작가들부터 그런 소설들로 등단했다 떠벌리는 이들까지 모두 반성하기 바란다. 우리 독자들은 그 작품들 못 읽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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